가장 극적인 바람, 르반떼 트로페오

르반떼를 처음 접한 건 지난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V8 협주, 그란카브리오 & 르반떼 GTS에서였다. 당시 르반떼 GTS는 트윈터보 엔진으로도 기존 V8 자연흡기 엔진의 음색을 훌륭하게 재해석했고, 달리기 시작하면 550ps라는 가공할만한 출력을 아스팔트에 모조리 쏟아냈다. 딱히 여기서 뭔가 더 필요하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애초에 마세라티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르반떼를 선보이기 전부터 트로페오를 기획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 시기가 2016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찍이 슈퍼 SUV의 왕좌를 꿈꿔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GTS에 무엇을 더해 트로페오를 완성하고 싶었을까?

고성능 SUV의 세계, 그리고 르반떼

현재 전세계 자동차 시장은 SUV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이에 다양한 체급은 물론 쿠페형 SUV, 전기 SUV, 브랜드 최초의 SUV 등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신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제조사간의 경쟁 구도도 치열해졌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화끈한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 고성능 SUV 시장이다.

고성능 SUV 시장이 특별한 이유는 경쟁자들의 클래스가 강력하다는 데 있다. 이미 고성능 SUV 분야에서는 카이엔과 레인지로버가 시장을 양분하고 있고, 도전자들만 해도 애스턴마틴, 벤틀리, 람보르기니 등 소위알아주는브랜드들로 가득하다.

마세라티 역시 이러한 고성능 SUV 시장에 일찍이 도전장을 내민 럭셔리 브랜드 중 하나다. 마세라티는 가문 최초의 SUV인 르반떼를 내세우는데, 레이싱 혈통답게 성능도 출중하다. 르반떼는 기본형 가솔린 엔진으로도 최고 출력 350ps를 발휘하고, S 430ps, GTS 550ps에 달한다. 여기에 이탈리아어로 트로피(trophy)를 뜻하는 트로페오가 최고 출력 590ps로 최상위 포지션에 군림하고 있다. 단순 출력만으로 놓고 본다면 고성능 SUV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조금만 더 드러내도 괜찮아

2월 어느 날 트로페오 시승을 위해 청담동의 전시장을 방문했고, 주차장에는 이미 여러 대의 마세라티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트로페오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차례 르반떼 GTS를 경험해봤기에 트로페오만의 차별화 포인트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마세라티 연구진은 리얼 카본을 들고 차체를 한 바퀴 돈 것이 분명하다. 프론트 범퍼에서는 하단 중앙부에, 리어 범퍼에서는 머플러 팁 부분에 리얼 카본을 적용함으로써 역동적인 이미지를 더해 놓았다. 물론 에어로 다이내믹과 승·하차시의 만족감을 더해주는 사이드 스커트 역시 빼놓지 않았다.

보닛에는 여느 고성능 차량들처럼 열을 식혀주는 별도의 공기 배출구가 마련되어 있다. 기능적으로도, 디자인적으로도 높은 만족감을 주는 부분이다. 트로페오는 마세라티 가문만의 포인트인 C필러 세타 로고, 즉 삼지창 엠블럼조차 타 마세라티 차량과 다르게 구현되어 있다. 단순 엠블럼만 붙여진 타 마세라티 차량들과 달리 엠블럼에 ‘TROFEO’라는 글자까지 새겨놓은 것이다.

후면에서 차량 등급을 드러내는 레터링도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존 르반떼가 좌측 후면부에 SQ4 혹은 GTS로 성능을 암시했다면, 트로페오는 기본형처럼 아무런 표시를 남겨두지 않았다. 대신 우측 후면부의 ‘Levante’라는 기본 레터링에 포세이돈의 창으로 밑줄을 그어 강조해놓았다.

다만 이 부분은 트로페오가 조금만 더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강력하고 비싼 르반떼라는 사실을 보다 효과적이고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말이다. 헤드레스트가 좋은 예다. 적어도 트로페오 정도의 성능과 가격이라면 그래도 된다.

가장 극적인 바람의 변화

르반떼는 지중해에서 부는 바람을 뜻한다. 이는 평소 나긋나긋하다가도 언제든 갑작스럽게 돌풍으로 뒤바뀌기도 한다. 단언컨대 트로페오는 르반떼 중에서도 변덕이 가장 심하고 극적인 바람이다.

대표적으로 주행 모드에 따른 변화가 그러하다. 마세라티 차량들은 기본적으로 그랜드 투어러 성향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일반적인 시내 주행에서는 스포츠성을 완벽하게 감추고 있다. 특히 I.C.E 모드에서는 배기음으로 유명한 마세라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온순해진다.

그러나 스포츠 모드를 작동시키면 마세라티는 레이싱 혈통의 본능을 되찾는다. 여느 차량들처럼 스티어링 휠이나 액셀러레이터 반응이 예민해지는 것은 기본이고,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서스펜션의 감쇠력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탄탄해진다. 또한 배기 사운드의 음량도 커지는 한편 음색도 날카로워진다. ZF사의 자동 8단 변속기 로직은 회전수를 3,000rpm 밑으로 떨어뜨리는 법이 없다. 여기에 에어 서스펜션이 스스로 차고 조절을 해준다는 것도 포인트다.

하지만 위와 같은 변화는 르반떼 GTS에도 있는 것이다. 트로페오만를 가장 극적인 변화라고 표현한 데는 바로 코르사 모드에 있다. 오직 트로페오에게만 허락된 코르사는 이탈리아어로 경주 혹은 레이스를 일컫는다. 이는 트로페오의 퍼포먼스가 스포티한 드라이빙뿐만 아니라 극한의 주행까지도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트로페오에만 탑재된 런치컨트롤도 코르사 모드에서만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구동력 제어 장치 역시 꺼지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코르사 모드는 진입부터 쉽지 않다. 우선 스포츠 모드를 활성화시킨 후 다시 한 번 눌러야 한다. 스포츠 모드보다 하드코어 하다는 반증이다. 그리하면 차체가 노멀 모드대비 35㎜만큼 낮아지며 한층 더 웅크리게 된다. 이외에도 주행과 관련한 모든 부품이 스포츠 모드보다 한층 예민해지는데,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황소를 다루 듯 미세한 터치에도 트로페오는 격한 움직임을 보인다.

초속 84m/s의 폭풍, 르반떼 트로페오

트로페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출력과 성능부분이다. 트로페오는 V8 3.8리터 트윈 터보 엔진을 탑재해 최고 출력이 무려 590ps, 최대 토크는 74.85kg·m에 달한다. 이를 기반으로 제로백은 3.9, 최고 속력은 304km/h를 기록한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대형 SUV의 제로백 및 최고 속력 앞자리가 모두 3이라는 것이다. 이는 분명 흔치 않은 수치로, 경쟁 SUV 중에서는 람보르기니 우루스와 아우디 RSQ8만이 간신히 넘어선 영역이다.

실제 체감되는 힘은 수치 그 이상이다. 가속 시 엄청난 힘이 온몸을 짓누르는 게 느껴진다. 강력한 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느낌이다. 고성능 차량에 익숙하지 않은 유저라면 두려움마저 느낄 것이다. 속도계가 100km/h에 도달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고, 200km/h에 도달하는 것도 잠깐이다. 어느 영역에서든지 이 차를 타면서 출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는 아무래도 트로페오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경량 스포츠카의 3초대 제로백과 중량급의 3초대 제로백 느낌이 다르듯, 트로페오는 2.3톤이라는 차체를 가속시키기 위해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의 출력을 퍼붓는다. 즉 출력만으로 3.9초라는 제로백을 가능케 하기에 몸으로 전해지는 체감 수치가 상상 이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같은 최고 출력을 낭비 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영리한 4륜 구동 시스템의 덕분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주행 조건에서는 모든 구동력을 후륜으로 전달하지만, 급가속 시에는 구동력의 일부를 전륜으로 전달해준다. 일반적인 4륜 구동 시스템 같지만, 전륜으로 보내는 구동력을 최소화해 후륜구동 특유의 감각을 갖는 것이 특징이다.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긴장감 넘치는 사운드 역시 체감 속도를 배가해준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엔진 및 배기 사운드가 우렁찬데다, 가속력이 엄청난 만큼 급격히 상승하는 회전계가 더욱 심박수를 부추기는 모양이다. 사운드 자체는 르반떼 GTS와 유사하나, 보다 맹렬하고 목청이 커진 느낌이다. 지난 콘텐츠에서 말했듯 그란투리스모의 V8 자연흡기 엔진 특유의 음색도 여전하다. 실내에서도, 실외에서도 귀를 항상 즐겁게 해주는 소음이다.


가장 극적인 바람, 르반떼 트로페오
안락한 이중 접합 유리와 스포티한 프레임 리스 도어의 아이러니한 조화. 르반떼 트로페오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시 온화한 바람으로

한바탕 폭풍이 불고 나면 하늘은 다시 맑아지는 법이다. 바람도 한결 온순해진다. 트로페오의 또 다른 성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스포츠 혹은 코르사 모드를 종료하면 트로페오는 차고를 높이며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워진다. 유럽 대륙을 누비는 편안한 그랜드 투어러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