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48V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장착한 르반떼와 기블리는 새 시대를 열려는 마세라티의 풀뿌리 기종이라 할 수 있다. 0→100km/h를 2.88초에 끊어내는 MC20과는 다른 방식이되, 2.0리터 기반 48V 시스템의 마세라티는 브랜드가 지향하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스탠더드를 충족시켜야 하는 ‘낀’ 존재일지도 모른다. 꼈다는 증거는 종교적인 내연기관 순수주의자들과 모터를 메시아 대하듯 하는 환경론자들에게 동시에 먹는 욕이다. 하지만 이런 입지는 동시에 이 차의 가능성일 수 있다. 시승을 통해 파란 삼지창을 단 마세라티의 미래를 조금 엿보았다.
힘겨운 오리지널,
전통과 시대적 가치 사이에서
마세라티의 MC20은, 더 이상 마세라티가 FCA에 곁방살이하는 페라리의 방계 혈족 신세에 대한거부였다. 새로이 개발한 3.0리터 네튜노 엔진은 630ps로 내연기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를 뽑아내며 마세라티만의 오리지널과 이상을 선언했다.
MC20이 재출발하는 마세라티의 이상이라면 르반떼와 기블리 하이브리드는 현실을 담당한다. 당연히 ‘윗동네’에 비해 맞닥뜨려야 하는 한계가 크다. 특히 전동화가 필수가 된 현 상황에서, 스텔란티스로 합병된 구 FCA의 전동화 실력이 신통찮다는 것도 제약이다. 지프에 2.0리터, 1.3리터 PHEV 라인업이 등장했지만 당장 마세라티에 적용할 만한 심장은 아니다. 그나마 전동화 라인업에서 꽤 발빠른 움직임을 보여 온 구 PSA 그룹과 한 식구가 된 것이 다행이다.
마세라티 하이브리드에 적용된 엔진은 구 FCA 그룹 브랜드들이 공유한 2.0리터 멀티에어 터보 엔진이다. 물론 시동을 걸 때 터져나오는 마세라티 특유의 맹수 같은 포효는 없다. 대신 배기 계통을 다듬어 중저음대의 소리를 입혔다. 기분좋은 중저음이라기보다 조금 인위적인 부밍(붕붕거림)에 가깝다. 마치 3M 이어플러그를 꽂고 718S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선호도는 갈릴 수 있다. 물론 불호 쪽으로 조금 더 기울 것 같지만, 탄소 저감에 대한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다. 페라리처럼 어차피 소수의 고객에게만 팔 건데 봐달라고 배짱 좋게 이야기할 처지도 아니다.
2.0리터 멀티에어 엔진이지만
싸구려 티는 나지 않는다
이 차는 e-부스터라는 시스템을 적용했다. 배기가스 유속이 부족한 저회전 영역에서 터빈을 가동해 저회전대와 고회전대 사이의 토크 이질감을 줄여주는 방식이다. 터보차저는 보르그워너 제품. 윈도우를 내리고 저속 주행하면 뭔가 ‘위잉’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린다. 48V 배터리 기반의 통합형 제너레이터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일수도 있는데, 사실 다른 48V처럼 엔진 휴지가 잦다든지 하는 존재감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 됐든 토크의 전개가 유연하다는 점은 매력이다. 구조적으로 복잡하고 효율이 떨어지는 트윈스크롤 싱글 터보보다는 확실히 낫다. 최대 토크가 45.9kg∙m인데 1,500rpm만 돼도 최대 토크의 80%인 35.7kg∙m가 발휘된다. 웬만한 2.0리터급 가솔린 터보 엔진들의 토크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소리에 대한 만족감을 굳이 따지지 않는다면 주행 상 파워 면에서 부족하다는 느낌도 없다. 종감속 기어비가 1:2.8인데다 타이밍 체인 방식으로, 엔진회전수를 올리는 데 대한 반응은 확실하다. 330ps라는 최고 출력 수치가 허언이 아니다. 기존 3.0 리터 디젤 엔진은 충분히 대체하고도 남는다. 정지 상태에서 100km/h에 달하는 시간은 5.7초다. 19인치 휠은 측면에서 보기에 멋은 덜하지만 가속에는 도움이 된다. 공차중량이 2,030kg에 달하지만 휠베이스가 3,000㎜에 달하는 차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8단 자동변속기의 반응 자체가 기민하지는 않다. 기어가 맞물리기만 하면 치고 나가긴 하지만 그 사이의 시간이 다소 길게 느껴진다. 킥다운에서나 패들 시프트 활용에서도 비슷한 감각이다. 어느 정도 내구성을 감안한 세팅으로 생각된다. ZF 제품인데, 마세라티를 실제 보유한 오너들의 기준으로는 개선된 편이라고 한다.
기블리, 어찌해서 마세라티에서 태어나…
엔트리 GT의 승차감
자동차 커뮤니티에서 기블리의 가치는 다소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다른 브랜드에 놓인다면 차체 크기도 그렇고 성능면에서도 결코 입문차로 격하될 수준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휠베이스와 전장이 긴 후륜 구동의 고속 직진 안정감을 갖고 있고 이건 어느 브랜드와도 견주어서 뒤질 수준이 아니다. 특히 뒷좌석의 안락함과 정숙성도 돋보인다.
전장이 길고 차고가 낮은 만큼 가속과 제동 시에 상하 움직임은 강력하게 절제된다. 48V 시스템의 배터리는 트렁크 아래에 장착됐고 직렬 4기통 엔진도 타 엔진보다는 가벼우므로 전체적인 무게 배분은 안정적이다. 다만 트렁크 내부는 배터리 열로 인해 상당히 더운 상태로, 혹여 음식물 등은 보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또한 트렁크 윗부분 스피커 유닛이 있는 쪽의 마감도 다소 부족하다.
선회 시 지지력은 탄탄하되 딱딱하지는 않다. 하체 근력과 지지력이 우수한 운동 선수가 충격완화 능력이 좋은 신발을 신고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선회 시 바깥쪽 바퀴가 눌렸다가 다시 일어설 때도 불필요한 출렁거림은 찾아볼 수 없다. 전륜은 더블 위시본, 후륜은 5링크 방식으로 모두 스태빌라이저 바가 장착돼 있다. 엔트리급 GT 중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수준이다.
피할 수 없는 친환경 전환,
마세라티 식의 적응
GT로서의 가치, 고성능 세단으로서의 자격을 따진다면 기블리 하이브리드가 특별히 빠질 데는 없다. 그러나 이 차는 어찌 됐건 ‘하이브리드’라고 명명됐다. 엄밀히 48V 시스템은 적극적인 전동화 파워트레인이라기보다 기존 내연기관 엔진의 아키텍처를 활용하고 생산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탄소 저감 방법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래서 8.9km/L의 연비는 분명 일반적인 친환경차 가치 기준에선 부족하지만, 대신 186g/km라는 배출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리터로 330ps를 발휘하는 차가 이 정도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면 준수하다. 실제로 배기가스 배출 물질 중 이산화탄소에 대해 민감한 유럽 시장의 특성을 고려한 제원이기도 하다.
이런 가치를 반영하듯 차량 곳곳에도 친환경의 이미지를 내려 애썼다. 차량 측면 에어벤트 그리고 C필러의 세타 로고에도 푸른 색 포인트가 들어갔다. 브렘보4피스톤 캘리퍼(전륜)도 블루 컬려였는데 이는 선택사양이다.
시트에도 섬유재가 에르메네질도 제냐 섬유재가 적용됐다. 물론 마세라티 골수 팬들이라면 기함할 노릇일지도 모른다. 트로페오의 피에노 피오레 등급 가죽, 독특한 직물 패턴이 들어간 콰트로포르테의 가죽 트림이 아니더라도 이건 너무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고급차라도 언제까지 메탄가스를 뿜어내는 소의 가죽에 집착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머지않아 고급화 처리된 재활용 소재를 스탠더드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친환경이 필요하면 돈으로 할게’라는 태도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될 수 없다.
물론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진 만큼 전체적 디자인 변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큰 변화는 후미등이다. 더 이상 2세대 K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