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SUV시대다. 많은 제조사들이 세단보다 SUV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심지어 럭셔리 세단의 끝판왕, 롤스로이스 마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역사상 첫 번째 SUV 컬리넌을 선보였다. 그리고 컬리넌은 롤스로이스 최초로 4륜 구동 및 4륜 조향 시스템을 적용했다. 또한 차명도 고스트, 팬텀, 레이스 등 초자연 현상을 뜻하는 단어 대신 1905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세상에서 가장 큰 3,1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의 이름을 사용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역대급 롤스로이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SUV가 인기라지만 컬리넌의 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롤스로이스에서 SUV를?’ 이라는 의문을 표했다. 대중들에게 롤스로이스는 114년간 하이엔드 럭셔리 세단을 만드는 제조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롤스로이스는 태생부터 오프로더였다. 한가지 일화를 이야기 하자면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였으며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실제 주인공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아라비아의 거친 사막지대에서 롤스로이스 9대를 전술차량으로 활용했으며 단 한번의 기계적 고장도 없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귀환했다. 그래서 로렌스는 “사막의 롤스로이스는 루비보다 값지다”라며 극찬했다. 그러니 오프로더로서의 롤스로이스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것은 자동차가 아니다, 궁전이다.
기자는 2018년 5월, 아직 수습 기자였을 때 처음 롤스로이스 컬리넌의 소식을 접했다. 당시 직접 실물을 보지 못하고 외신 보도 자료를 번역해 단신 기사만 작성했다. 이 후 2년이 지난 2020년 5월, 기자는 롤스로이스 청담 부티크에서 심플한 디자인의 컬리넌 스마트키를 들고 시승차 출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장 5,341㎜, 전폭 2,164㎜, 전고 1,835㎜의 롤스로이스 컬릴넌은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키가 181cm인 기자조차 압도했다. 정말 웅장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자동차라기보다 잘 지어진 건축물과도 같았다.. 전체적인 외관은 비슷한 가격대의 고스트 보다 오히려 상위급인 팬텀을 많이 닮았다. 파르테논 신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그릴은 플래그십인 팬텀의 것 보다 더 크다. 참고로 롤스로이스의 그릴은 동일한 금형을 통해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동일 차종이라도 각자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다. 또한 롤스로이스의 시그니처인 환희의 여신상은 보닛 위에서 특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롤스로이스의 외관을 완성한다.
컬리넌의 측면 실루엣은 다른 SUV들과 다르다. SUV는 엔진 룸과 탑승 공간으로 구분된 2박스 형태지만 컬리넌은 이런 클리셰를 약간 비틀어서 엔진룸과 탑승 공간 그리고 트렁크를 명확히 분리시킨 3박스 스타일을 취했다. 즉, 트렁크가 세단처럼 튀어나와 있는 SUV다.
이런 전면에 비해 뒷모습은 팬텀을 세로로 잡아 당겨놓은 듯한 형태일 뿐, 눈에 띄는 디자인적 엑센트가 없고 평범하다. 사실 이는 롤스로이스 차종들의 공통점으로 웅장한 전면에 비해 후면이 평범하다. 사실 이는 롤스로이스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이 차가 주로 등장하는 장소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고급차가 호텔 또는 행사가 열리는 장소에 진입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전면 모습이다. 그래서 롤스로이스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차와 탑승자의 존재감을 멀리서 알아볼 수 있도록 후면 보다 전면을 더 신경 써서 디자인한다. 그래서 컬리넌의 후면도 평범하다.
숙박비 5억원? 움직이는 초호화 럭셔리 호텔
컬리넌에 탑승하기 전 롤스로이스의 담당자는 차에 앉는 순간의 느낌부터 다를 거라고 전했다. 정확한 표현이다. 맞춤 옷을 입은 듯한 안락함을 주는 1열 시트는 내로라하는 고급 차들이 그저 그런 소형차처럼 느껴질 정도다. 2열 시트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카우치처럼 피로가 저절로 풀리는 느낌을 준다.
2열에는 롤스로이스 역사상 최초로 폴딩 가능한 시트가 적용됐다. 다만 샴페인 냉장고와 잔이 포함된 개별시트 옵션을 선택하면 폴딩이 불가능하지만 대신 시트를 몸에 꼭 맞게 조정할 수 있어 궁극의 편안함을 즐길 수 있다.
실내 품질은 명불허전 롤스로이스다. 특히 최고급 호텔에서나 볼 법한 진짜 양모 매트가 차량 바닥에 깔려있어 신발을 벗고 타야 될 것 같은 분위기를 전한다. 그 촉감 역시 매우 부드러워서 발을 올리고만 있어도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디지털 클러스터는 초당 120 프레임으로 디지털 방식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인다. 이 밖에도 사방이 천연 가죽과 피아노 블랙 우드 트림, 리얼 알루미늄으로 도배되어 있다. 심지어 사이드미러를 조절하는 레버마저 알루미늄이고 시트는 물론 공조기의 바람을 조절하는 다이얼까지 가죽으로 마감했다. 정말 여기가 고급 호텔인지 자동차인지 헷갈릴 정도다.
물론 아쉬운 부분들도 있다. 기아 모닝에도 풀오토 에어컨이 들어가 있는데 그보다 훨씬 크고 비싼 컬리넌은 온도 조절이 오토가 아닌 수동이다. 물론 수동 방식이 보다 정확한 온도 설정이 가능하고 롤스로이스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의미는 알겠지만 클러스터까지 디지털로 변경했으며 스티어링 휠에 있는 버튼들도 물리적 방식이 아닌 터치식으로 바꾼 것을 생각하면 모순이다. 이 외에도 옛날부터 이어져온 롤스로이스의 전통인 컬럼식 기어 레버는 조작감이 가볍고 헐거워 저렴한 느낌이 든다. 또한 운전석과 조수석 중간에 위치한 센터콘솔의 열고 닫는 조작감은 국산 중형세단 정도. 충분히 고급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 부분이어서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이 밖에도 컬리넌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사실상 BMW의 아이드라이브(iDrive)를 그대로 사용한다. 최소한 폰트만이라도 롤스로이스다운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래도 나이트 비전과 파노라믹 뷰가 적용된 4-카메라 시스템, 올라운드 뷰, 헬리콥터 뷰 등을 지원한다. 물론 이전까지 롤스로이스에서는 상상 할 수 없었던 첨단 주행 보조 장비들, 예컨대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 충돌 경고 시스템, 후측면 접근 차량 경고 시스템, 차선이탈 및 차선변경 경고 시스템 등도 탑재되어 있어 수월한 주행을 도와준다.
A380 퍼스트클래스와 럭셔리 요트의 중간 단계
촬영지로 가기 위해 시동을 걸자 6.75리터 트윈터보 V12엔진이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존재감을 알린다. 그것도 잠시 엔진의 회전수가 내려오고 아이들링 상태가 되자 시동이 걸려 있는 상태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심지어 이상한 소리를 내는 전기차 보다 더 조용하다. 엔진의 실린더가 무려 12개나 되기 때문에 미세한 진동 조차 없다. 혹시 창문을 내리면 엔진음이 들릴까 했지만 청담동의 시끄러운 소음만 들어올 뿐 컬리넌의 엔진음은 들리지 않는다. 다시 창문을 닫으면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스티어링 휠과 가속 및 제동 페달은 가볍고 경쾌하다. 하지만 절대 불안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페달과 스티어링 휠이 가벼운 차량들을 운전하면 지나치게 획획 움직이고 어디로 튈지 몰라 심리적으로 불안해 정신적으로 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