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차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 되던 시기는 지났다. 대중적 차종에서 수입차들의 네임밸류 하락이 두드러진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제조사 차량의 품질이 그만큼 향상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오히려 차의 진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수년 전 현대차의 고객 행사에 참여한 한 고객은 자신에게 로망인 자동차는 혼다 어코드였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대중적 브랜드의 차량이 누군가의 로망이 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평범하지만 로망일 수 있는 것이 혼다라는 브랜드가 가진 힘이고, 그런 가치가 녹아 있는 SUV가 바로 CR-V다.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소소한 디자인 변경을 거친 뉴 CR-V 터보를 만나봤다.
완벽한 배우자 상에 가까운 디자인
놀랄 정도의 미인은 아니지만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는 예쁘고, 심심한 듯하지만 톡톡 튀는 매력이 있다. 그런 게 CR-V의 외관이다. 교태 넘치는 연인이라기보다, 지친 일상에 문득 힘을 주고 일으켜 세워주기도 하는 이상적인 배우자의 모습에 가깝다.
물론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약간의 ‘시술’은 받았다. 풀 LED 헤드램프로 눈에 힘을 줬고, 범퍼 하단에 머물던 크롬 트림의 윤곽이 보다 위로 올라가 탄탄하고 와이드한 모양새를 만들었다. 범퍼 좌우 하단에는 LED 안개등이 1구씩 원형으로 박혀 있다. 프런트 그릴은 시빅 스포츠처럼 강인한 인상의 블랙 컬러가 적용됐다.
후미의 경우도 비슷한 디자인이 적용됐다. 듀얼 배기 파이프 위로 크롬 트림이 낮고 길게 지나간다. 후미등의 베젤은 가장자리가 블랙 타입으로 전후 이미지의 상관을 연출한다. 측면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동급에서는 드문 19인치 휠이 적용됐다. 전기형에 적용된 태풍 형상의 휠도 멋있었지만 이 휠도 깔끔한 매력이 돋보인다. 주 커뮤니케이션 컬러인 라디안트 레드 메탈릭과도 잘 어울린다.
담백하고 깔끔한 실내,
수납성은 업그레이드
어코드도 그렇고 혼다 차종에서 그 가치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게 좌석의 매력이다. 앉는 순간 오래 앉아 왔던 차인 것 같은 안정감과 부드러운 착좌감이 차분한 기분을 만들어낸다. 미국 시장 지향 차종답게 벤치 타입에 가까운 시트 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선회 시 몸이 흔들린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특별히 고급 소재를 쓴 것은 아니지만 완성도 높은 가죽 시트다. 뉴 CR-V 터보는 외장 컬러와 인테리어 컬러 색이 세트로 묶여 있는데 라디안트 레드 메탈릭은 밝은 색의 아이보리 시트가 적용돼 있다. 만져보면 오돌도톨한 질감이 살아 있는 풀 그레인 타입이다. 나파 가죽과 같은 고급스러운 질감은 아니지만 거칠지는 않다. 무엇보다 견고함이 매력이다.
역시 실내는 간소하다. 한국 브랜드 차종들의 자잘한 세부 사양이나, 클러스터, 센터의 터치스크린 등에 나타나는 유럽 브랜드의 휘황 찬란한 액션도 없다. 대시보드와 센터 콘솔 테두리에 있는 우드 트림처럼 차분한 분위기다. 물론 센터페시아 한가운데 있는 1자형의 변속레버는 ‘올드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미안하지만 이건 ‘쉴드’를 쳐주기 어렵다. 그러나 국내 출시될 가능성이 높은 북미형 하이브리드 버전에는 버튼식 변속기가 적용된다.
편의성 면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스마트폰 무선 충전 패드의 위치다. 스마트폰을 놓고 집어올리는 것 모두 편안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 뒤의 수납공간은 노멀, 수납, 대용량 모드 세 가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개선됐다. 차를 혼자 타는 사람들은 뒷좌석보다 앞쪽에 소지품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좌석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참고로 수납공간이 많아도 차가 어지러운 사람은 끝까지 어지러운데, 정리의 시작은 버리는 것이다.
2열과 트렁크는 풀 플랫 기능이 적용된다. 2열 등받이 쪽이 살짝 높긴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편리하다. 같은 크기에도 실내 폭을 넓게 만들 수 이는 일본 브랜드 특유의 패키징 기술력이 돋보인다. 대부분 제조사들은 준중형 SUV를 패밀리 지향으로 마케팅하고 있으나 혼자를 위로하기 위한 공간으로도 제격이다.
독보적인 존재감,
1.5VTEC 터보+CVT
미국 시장에서 CR-V는 토요타의 라브4(RAV4)와 자웅을 겨룬다. 누적 판매량은 CR-V가 훨씬 많고 최근 들어서는 엎치락뒤치락한다. 한국에서는 하이브리드 라인업이 있는 라브4가 좀 더 유리한데, CR-V도 2019년에 추가된 하이브리드 버전을 국내로 들여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순수 엔진만을 놓고 봤을 때, 1.5리터 VTEC 터보 엔진과 CVT가 적용된 CR-V는 라브4와 이루는 경쟁구도보다 독보적 존재감이 더 눈에 띄는 차다. 라브4의 가솔린 버전은 최고 출력 207ps, 최대 토크 24.8kg·m(4,000~5,000)의 2.5리터(2,487cc) D-4S(포트, 직분사 겸용) 자연흡기 엔진이다. 그러나 CR-V의 1.5리터 VTEC 터보는 직분사로 라브4와 동일한 수치의 최대 토크를 2,000~5,000rpm에 걸쳐 발휘한다.
부드러움과 정숙성을 원한다면 라브4가 좋겠지만 액셀러레이터를 깊게 밟지 않아도 순발력 있게 치고 나가는 주행 감각을 원한다면 이 CR-V 쪽이 적합한 선택이다. 최고 출력도 196ps에 달하는데 정속 주행 시 엔지 회전수에 여유가 있다 보니 최대 토크 구간을 충분히 활용하며 추월에 필요한 가속도 발휘할 수 있다.
터보 엔진과 CVT의 조합은 흔치 않다. 사람에 따라서는 제원만으로도 질색할 만하다. 그러나 현재의 CVT는 벨트가 걸려 있는 풀리(도르래)의 폭을 제어하는 방식을 단순히 유압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전자 제어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다. 따라서 이제는 자동변속기에 가까운 변속 속도를 보이고 CR-V 역시 그러한 면모를 보인다. 다만 이 정도의 반응 속도라면 별도의 패들 쉬프트를 장착해도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단 기어를 별도로 둔 것도 꼭 필요가 있었을까? 크게 납득이 가진 않는다.
CVT 특유의 고회전 소음은 느낄 수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고속 정속 주행을 하다 보면 정숙한 구동음과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이 적용된 차체 덕분에 매우 조용하다. 고양이의 ‘골골송’ 같은 구동음도 듣기에 따라서 나쁘지 않은 ASMR이다. 이렇게 조용하다 보니 의외로 A필러와 도어 미러 사이에서 조금 높은 톤의 주행풍이 느껴진다. 마찰에 의한 푸드덕거림은 아니고 좁은 바람이 좁은 틈을 지나가며 내는 소리로 들린다. 신차 출고 고객들은 체크해볼 부분이다.
스쿼트 좀 했나? 탄탄해진 하체
뉴 CR-V 터보는 이전에 비해 다소 하체가 단단해졌다. 19인치 휠이 적용되는데, 그에 따라 가변형의 댐퍼가 적용됐다. 댐퍼 내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여 부드러울 때는 확실히 부드럽게 하겠다는 게 개선 방향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부드러움보다는 고속 온로드 주행에 어울릴 만한 단단함이 주된 인상이다. 라브4보다도 약간 더 스포티한 세팅이다. 과속 방지턱을 맞닥뜨릴 때는 최대한 감속을 하는 게 좋다. 대신 선회 시 자세 유지 능력은 발군이다. 스티어링휠의 조타감도 유기적이고 긴장감이 넘친다.
전자제어식 리얼타임 AWD 모드는 별도의 레버나 버튼 조작이 아니라 노면 상태에 따라 활성화된다. 그 상황은 클러스터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실내에 조작버튼을 과시적으로 늘어놓는 게 아니라 운전자가 조작하기 전에 차량이 알아서 노면 상태를 체크하고 위험한 상황을 예방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개념이다.
10월 한 달 400만 원 유류 지원,
3~4년치 기름값 굳어
4륜 구동 기준으로 이 차의 연비는 복합 11.5km/L다. 도심 기준으로는 10.7km/L, 고속도로 주행으로는 12.7km/L 수준이다. ISG(아이들링 스탑 기어) 적용 덕분에 도심 주행 연비가 소폭 개선됐다.
그러나 실제 주행 중에는 이미 도심 연비가 복합 연비를 넘어섰다. 시승 주행의 특성상 가속과 감속을 자주 반복함에도 복합 연비는 12~14km/h에 이른다. 혼다 센싱의 자동감응식 정속주행 장치라도 켜고 주행하면 그 이상으로도 구현할 수 있다.
혼다코리아는 10월 한 달간 뉴 CR-V 터보의 전륜 구동 기준으로 400만 원, 4륜 구동 투어링 기준으로 500만 원의 유류비 지원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유가 기조가 지속되고 있는데, 한국 석유공사 오피넷 기준으로 전국 휘발유 평균 가격은 1,335원(10월 2주차 기준)이다. 만약 14km/L 연비가 꾸준히 나온다면 1km 당 유류비는 95원이다. 한국 운전자들의 평균 차량 운행 거리가 1만 3,000km 정도임을 감안하면 123만 원 정도가 든다. 거의 3~4년치 유류비가 나가지 않는 셈이다.
혼다의 뉴 CR-V 터보는 외부적으로 ‘나 이 차 탄다’라고 자랑할 만한 차는 아니다. 원래 과시용과는 거리가 먼 차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이나 눈을 현혹시키는 조작계를 떠나 자동차의 본질을 느끼며 만족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이 이상의 차가 있기 어렵다. 과거처럼 한국 수입차 시장에서 1위를 점할 수야 없겠지만 여전히 CR-V는 ‘나 혼다 탄다’는 걸 부끄럽게 만들지 않는 차다.
글·사진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