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같은 이치로 고성능 자동차를 즐기려면, 고성능을 뒷받침하는 스포츠성향 타이어의 단단한 사이드 월, 허리가 아플 정도로 견고한 서스펜션, 무자비한 연료 식탐, ‘억’소리 나는 가격 등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다면 슈퍼카에 준하는 성능을 지닌 재규어 F타입 SVR 컨버터블은 약 2억원을 지불하고, 위와 같은 불편함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칼데라 레드 컬러의 F타입 SVR 컨버터블에 올랐다.
아무나 등에 오를 수 없다
한껏 몸을 낮춘 자세는 영락없이 사냥감을 앞두고 긴장한 고양잇과 동물의 자세였다. 이런 F타입 SVR의 등에 올라타는 일조차 여느 차와는 다른 과제로 다가왔다. 착석하고 나서 눈에 들어온 계기반 속도계의 한계 수치는 360km/h였다. 범상치 않은 동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주위의 소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이 사나운 재규어를 깨웠다. AMG의 V8 엔진이 기계적인 중저음을, 마세라티의 V8 엔진이 고급스럽고 깊은 울림의 관악기 소리를 낸다면, 재규어의 V8 엔진은 말 그대로 거칠고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특징이다. 정말 맹수에 올라탄 기분이 들었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문 V8 5.0리터 슈퍼차저 엔진은 아이들링 상태에서 자연흡기 방식처럼 두터운 배기음을 쏟아냈다. 터보 엔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꽉 찬’ 울림이다.
그러나 시동을 걸고 시내 주행을 할 때만 해도 재규어의 야수성을 몰라봤다. 주행 모드를 노멀로 두고 시내를 달리는 감각은 여느 고성능 스포츠카의 일상 주행 영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댐퍼는 기본적으로 단단했으나 노면의 충격을 걸러낼 때는 부드러움도 발휘했다. 과속방지턱을 통과할 때의 움직임도 단단함(stiffness)를 강조했다기보다는 유연함이 느껴졌다.
강력하고 두터운 토크 덕분에 60km/h 이하의 속력에서 회전계는 1,500rpm을 넘길 일이 없다. 실제 시내 주행 시에는 1,000~1,200rpm 수준으로도 주변 교통 흐름을 따라가는 데 큰 무리가 없다. 저회전대에서도 지연 없이 토크가 발휘되는 슈퍼차저 대배기량 엔진의 여유로움은 생각 이상의 온순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고속주행에서 들어서면 본모습이 드러난다. 100km/h로 고속도로를 주행할 때 회전계는 1,300rpm에 불과하다. 이 정도 속력에서는 추월 시 변속조차 필요 없다. 속력을 150km/h까지 끌어올려도 회전계는 2,000rpm 수준이다. 저회전을 유지할 때, 시내 연비는 6.3km/L, 고속 연비는 13km/L대를 구현한다. GT카인지 스포츠카인지 정체성이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재규어가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액셀러레이터를 일정 깊이 이상 밟으면 마치 굶주린 맹수가 사냥감을 향해 돌진하듯 폭발적인 스피드로 달려나간다. 스로틀 반응도 즉각적이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속도계와 회전계가 솟구친다. ZF사가 제작한 8단 자동변속기는 반응이 빠르다. 고단 기어에 물려있다가도, 액셀러레이터의 옆구리를 조금만 찔러줘도 원하는 단으로 맞춰준다.
최고 출력 567hp(575ps / 6,500rpm), 최대 토크 71.4kg·m(3,500~5,000rpm)를 발휘하는 V8 5.0리터(5,000cc) 슈퍼차저 엔진은 정지상태에서 100km/h까지 단 3.7초 만에 가속할 수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속도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멀어졌던 자동차들이 금새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F타입 SVR 컨버터블은 200km/h를 정말 손쉽게 넘나든다. 500hp대의 최고 출력은 일부 차종을 오랫동안 경험해온 탓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F타입 SVR 컨버터블의 맹렬함은 이보다 한 수 위다.
00:05
00:00
00:05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