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모든 자리는 기한이 정해져 있다. 인연이 있으면 인연 다함이 있게 마련이다. 오랫동안 한국과 인연을 맺었던 스타급 외인 디자이너와 임원이, 차례로 한국에 안녕을 고하거나 예고했다. 2015년 현대자동차에 부임해 그랜저 IG와 최근 3세대 G80등 역작을 남긴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과, 국산차보다 많이 팔리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신화를 만들고 고성능 라인업의 저변 확대를 이끌어낸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 CEO가 그들이다.
“현대기아차의 미래 설계에 함께해 영광이었습니다”
행복 찾아 떠나는 루크 동커볼케
“나의 집과 사무실은 세계다.” 2016년 12월, 그랜저 IG 디자이너와의 대화 프로그램에서 루크 동커볼케(Luc Donckerwolke) 부사장이 남긴 메시지다. 실로 그는 타고난 코스모폴리탄이었다. 벨기에 국적이라 알려졌지만 남미의 페루에서 태어나 유럽 각국을 옮겨다니며 살았다. 교육도 벨기에에서 엔지니어링을, 스위스에서 디자인을 배웠다. 커리어도 푸조에서 시작해 폭스바겐, 벤틀리 그리고 현대기아차 그룹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덕분에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등 영미 유럽권 언어뿐만 아니라 일본어, 중국 보통화(표준어) 심지어 스와힐리어까지 가능하다고 한다. 한국에 부임할 당시 “한국말도 곧 익히겠다”고 했는데 공식 석상에서 한국식 유머가 나온 적은 없는 걸로 봐서 ‘한국어 패치’가 완벽히 적용되기 전에 떠나는 모양새다.
그의 사직 사유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는 게 현대차의 전언이다. 통상 임원 교체 배경에는 치열한 파워게임이 있기 마련이지만, 부사장 신분이면서도 디자이너라는 직군의 특수성 그리고 초빙의 성격이 강했던 인물인 점을 고려하면 ‘일신상 사유’라는 표면적 이유에 별다른 의심의 정황은 없어 보인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 이유인데, 그는 1965년 6월 19일생으로, 올해 만 55세가 된다. 납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후임조차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부임한 후 적어도 디자인 파트에서는 현대기아차가 훌륭한 조직이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뛰어난 리더의 덕목 중 하나다.
그는 제네시스의 3세대 G80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네시스는 럭셔리 브랜드를 지향하지만, 해당 영역에서 후발 주자일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브랜드 정체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G80은 어쩌면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차를 통해 한국과 세계 각국 전문가들의 호평을 끌어냈다. 3세대 G80은 명차들의 분위기를 벤치마킹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디자인과 GV80, G90 등 다른 라인업 간의 관계도 견고하게 구축함으로써 제네시스만의 새로운 브랜드 가치를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어쩌면 그는 3세대 G80까지를 현대기아차와 자신이 함께 할 시간의 마지막으로 미리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마무리가 좋기는 어렵다.
공식적으로 그는 ‘은퇴’를 말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젊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복귀하리라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다만 그의 디자인은 전체적으로 엔진 시대에 최적화돼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가 차후 더욱 가속화될 전동화 파워트레인 시대에, 경륜과 열정을 다시금 살려낼 수 있을까? 그건 차후의 이야기고, 지금은 그가 바랐던 바처럼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를 기원한다.
“고마웠습니다, 한국! 저는 미국으로 갑니다”
성공적 임기 마치고 미국 총괄로 떠나는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CEO는 오는 8월까지가 임기다. 막연히 ‘삼각별’, ‘고급차’라는 가치를 넘어, 메르세데스 벤츠의 철학을 국내에 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CEO이기도 하다. 전임 회장인 디터 제체 회장의 ‘코드 블루’ 드레스코드를 따른 프리젠테이션 의상으로,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가 글로벌 가치를 따른다는 점도 몸으로 보여줬다. 또한 마크 레인 부사장과 함께 소수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던 AMG 브랜드를 보다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문화를 진심으로 즐기고 좋아했다는 것이 미디어 관계자들 사이의 후문이다.
만 49세이던 2015년 한국에 부임했던 실라키스 CEO는 1992년 그리스에서 세일즈 담당자로 커리어를 시작한 후, 전세계 지사를 거치며 메르세데스 벤츠의 성장을 견인했다. 특히 그는 성장 전략 전문가로 평가가 높다. 한국 시장의 경우만 해도 볼륨 모델로 성장할 수 있는 차종의 선정을 통해 시장을 확장하고 여기에 AMG 등 메르세데스 본연의 가치가 담긴 고급화 전략을 함께 구사해,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브랜드의 층위를 두텁게 했다. 특히 입문 고객들이 생애 주기를 통해 성장해 메르세데스 벤츠 내 고급 라인업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한다는 장기적 브랜드 가치 주입은 눈여겨볼 만한 전략이다.
실라키스 CEO는 이제 미국으로 간다. 오는 9월 1일부터 메르세데스-벤츠 USA의 영업 및 제품을 총괄하게 된다. 다만 미국은 현재 매우 어려운 시장이 됐다. COVID-19의 피해가 커 구매력이 떨어지고 있는데다, 재선을 앞두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와 경제 모든 면에서 예측이 쉽지 않은 즉흥적 언어를 구사해 혼란이 가중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COVID-19 사태 이전까지 미국 경제가 매우 호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후 반등을 노려볼 수 있기는 하다.
실라키스 CEO는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지나간 자리가 꽃길이 된 경우가 많다. 그 꽃길을 물려받을 인물은 메르세데스-벤츠 스웨덴 및 덴마크 사장이었던 뵨 하우버(Björn Hauber) 씨다. 뵨 하우버 신임 사장은 1996년 다임러 그룹에 입사해 독일, 동남아시아 등에서 제품 전략, 네트워크 개발 등의 업무를 담당한 바 있다. 이후 2007년 중국의 메르세데스-벤츠 승용부문 세일즈 마케팅 업무를 시작으로 지난 2013년부터는 메르세데스-벤츠 중국 밴 부문의 대표를 역임했으며, 2016년 메르세데스-벤츠 스웨덴 및 덴마크의 사장으로 부임했다.
아시아 기업 환경은 외인들에 그리 관대하지 않다. 특히 일본 같은 경우는 능력 있는 외인들을 뽑아 놓고 얼굴 마담으로 쓰며, 내부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이중적인 행태로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중국은 논리가 막히면 대국이라는 입장만을 내세운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외인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이상을 설계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루크 동커볼케와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이 두 사람은 2010년대 후반, 한국 자동차 시장에 분명히 기억될만한 자취를 남긴 이들로 기록되어야 한다.
글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