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단, 특히 C 세그먼트 이하급의 인기는 예전만 못합니다만, 그래도 혼다 시빅은 달랐습니다. 혼다의 11세대 시빅이, 화제의 전기차 루시드 에어와 폭스바겐 골프를 제치고 2022년 북미 올해의 차(North American Car of the Year, NACOTY) 승용 부문에 선정됐습니다. 시빅으로서는 2006년 8세대와 2016년10세대에 이어 세 번째이며 2세대 연속 수상입니다. 또한 혼다 브랜드로서는 지난 6년간 픽업트럭 릿지라인과 어코드를 포함해 4회 수상 기록이기도 합니다.
2년 연속 30만 대 미만
엔트리 세단 약세 속에 체면치레 |
COVID-19로 인한 생산 차질과 반도체 수급 부족 등의 이슈로, 시빅의 북미 기준 판매량은 2020년부터 30만 대 선으로 내려왔습니다. 10세대의 마지막인 2020년엔 26만 1,200여 대를 기록했죠. 11세대가 나온 2021년에도 약 2,500대 정도 늘어난 26만 3,700대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최저 판매량이 32만 대를 넘었죠.
그러나 동일 시기 경쟁자들이 주춤했습니다. 토요타 코롤라의 경우 22만 3,200여 대로 시빅에 4만 여대 정도로 뒤처졌죠. 현대 엘란트라(아반떼)는 12만 7,300여 대로 현격한 격차를 보였습니다. 참고로 토요타의 경우는 2021년 북미 시장 전체 판매량 1위를 거둔 것으로 만족하는 분위기입니다.
정작 시빅의 경쟁자는 동급 차종이 아니라 SUV들이죠. 즉 해당 세그먼트를 향하던 생에 첫 차 구매고객들이 소형 SUV로 빠져나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2020년 8만 4,000대 수준이던 혼다의 소형 SUV인 HR-V가 13만 7,000대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시빅 고객들이 흡수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차들은 세그먼트 특성상 반도체 의존도가 낮아 생산이나 출고 지연의 영햐을 덜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시빅이 잘 나갈 때도 자동차 시장에서의 이러한 경향은 이미 감지됐죠. 게다가 미국 시장에서 첫 차를 사는 젊은 고객들이 시빅을 택하기는 해도, 감정적으로 이끌려서가 아니라 싸고 견고해서라는 것도 무시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혼다는 외관과 실내 디자인에서 기존 혼다의 솔리드 윙 페이스 대신 보다 와이드하고 스포티한 디자인을 적용하며 변신을 꾀했습니다. 인테리어에는 10.2인치 터치스크린도 적용했죠. 혼다 센싱도 최저 트림부터 기본화했습니다. 여기에 2020년 11,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온라인 플랫폼인 트위치를 통해 신차를 공개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전동화에 밀리지 않는 우수한 효율
펀카로서의 오랜 가치 유지 |
혼다는 하이브리드 라인업이 강하지만 완전 전동화에서는 다소 늦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유럽 시장에 론칭한 혼다-e가 있긴 하지만, 결국 BEV(배터리기반 순수전기차)는 GM과 LG 에너지솔루션 합작 법인인 얼티엄셀즈의 얼티엄 플랫폼을 활용하기로 용단을 내렸죠.
하지만 그럼에도 시빅을 포함해 혼다 차량들이 우수한 평가를 받는 것은, 전동화 파워트레인 못지 않은 효율과 유지비 덕분입니다. 여기에 11세대에서는 동력 성능 업그레이드도 있었죠. 기존 2.0리터 자연흡기 엔진의 출력 사양은 158hp(160ps)로 동일하지만 1.5리터 가솔린 터보가 180hp(182ps)로 소폭 상향됐습니다. Si 모델이 아님에도 그러합니다. 좀 더 큰 터빈을 사용하는 Si의 경우에는 기존 205hp에서 200hp로 출력이 약간 하향 조정됐으나 공차 중량이 26%나 줄어들었습니다. 명불허전 하지만 가격은 2만 7,000달러(한화 약 3,200만 원)으로 적당한 선이죠.
즉 누구나 선망하는 기종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선택해서 후회하지 않으며, 예산을 아주 조금만 더 투자한다면 펀카로도 즐길 수 있는 차가 시빅이라는 인식이 이번에도 승리를 거둔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빅이 언제까지 이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얼티엄 플랫폼을 사용하기로 한 이상 현행 세대에 별도 개발비를 들여 전동화를 추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페이스리프트 단계에서 타사의 전동화 플랫폼을 넣기도 어렵겠죠. 결국 시빅은 현재 시빅의 방법대로 끝까지 가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시빅은 200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수입차 시장에서 양극화가 진행된 2010년대 중반부터는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11세대 시빅의 경우 국내 도입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서야 ‘출시해주세요’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그것이 수요로 전환되는 일은 흔치 않죠.
다만 글로벌 e-커머스 기업들의 사업 영역이 확대되고, 자동차 온라인 직구에서 인증 비용 지원 등 서비스 영역이 늘어난다면 굳이 시빅처럼 해외 출시 차종을 원하는 이들이 국내 법인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니까요.
글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