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일본 브랜드들을 평가절하하는 의견 중,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에 집중하느라 전동화 전략에 뒤처졌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하이브리드 역시 전동화 파워트레인이죠. 게다가 순수 전기차라는 BEV(배터리 기반 전기차)에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는 데 있어 화석 연료의 비중이 아직 높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내연기관의 효율을 극대화해 모터와 조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결코 사양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배터리 원자재를 둘러싼 에너지 패권 경쟁, 리튬 채굴과 관계된 환경 파괴 등도 무시 못할 수준이어서 하이브리드가 제공하는 가교로서의 역할은 더욱 길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14일, 미베 토시히로 혼다기연공업 CEO는 북미 시장에서 하이브리드 라인업의 강화를 다시금 공언했습니다. 특히 세대 교체 주기를 맞이한 자사 대표 SUV CR-V와 대표 세단 어코드 신형의 하이브리드 버전을 2022년 내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CR-V 하이브리드와 어코드 하이브리드는 각 차종에서 5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혼다의 계획입니다.
또한 현행 CR-V와 어코드 하이브리드에 적용되는 2.0리터 엔진 기반 2모터 하이브리드 시스템인 i-MMD(Intelligent Multi-Mode Drive)를 시빅 하이브리드에도 적용해,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i-MMD 시스템은 엔진 측에 연결된 충전용 모터와 차축에 연결된 구동용 모터를 기반으로, 모터 출력으로만 184ps의 최고 출력을 발휘합니다. 최대 토크는 32.1kg·m에 달해 동급 배기량의 타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 대비 EV 모드의 활용 범위가 넓습니다.
현재 국내 시판 차종을 기준으로 CR-V 하이브리드 4륜 구동 투어링의 경우 공인 복합 연비가 14.5km/L, 어코드의 경우 17.5km/L인데, 실제 주행 연비는 모두 20km/L를 가볍게 넘긴다는 것이 실제 유저들의 전언이기도 합니다.
혼다는 2040년까지 전세계 시판되는 차종의 100%를 전동화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이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계획은 이미 전임인 2017년 하치고 타카히로 CEO가 밝힌 바 있습니다. 즉 BEV의 개발이 늦어서 하이브리드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실제로 혼다는 1989년부터 전기차 개발 사업부를 두어 운영했고 오히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그 과정에서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산물이 너무 잘 나온 것이 문제라면 문제죠.
BEV 전략에서 손을 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유럽에서 배터리 기반 전기차인 혼다-e를 선보였고 GM과 협력해 전용 플랫폼 기반 전기차 개발에 나섰습니다. 여기엔 LG 에너시 솔루션의 배터리가 들어가죠. 그간 혼다가 워낙 혼다 오리지낼러티만 강조해서 그랬지 글로벌 모빌리티 기업들이 협력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재미있는 차도 나올 계획입니다. 전동화 파워트레인 기반의 고성능 플래그십 스포츠카도 베일을 쓴 이미지로 공개됐는데요. 2016년, 혼다는 ‘파이크스 힐 클라임 레이스’에서 NSX의 EV 콘셉트 버전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21년 NSX 2세대의 단종 때도 EV 스포츠카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죠.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혼다는 전동화 연구 개발에 향후 10년간 5조엔(한화 약 48조 7,0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입니다. 또한 지난 1월, 일본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제 14회 오토모티브 월드>에서 전고체 배터리에 대한 개발 비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전고체 배터리를 포함한 리튬이온 배터리 대체 사양에 대한 연구 비용은 천문학적 단위입니다.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은 에너지 총 비용을 산출하는 데 있어 중요한 WTW(Well To Wheel, 석유채굴에서 차량 사용까지의 에너지 비용) WTT(Well To Tank, 채굴에서 연료 판매까지의 에너지 비용) 등을 따졌을 때 순수 전기차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습니다. 특히 발전에 있어서 화석 연료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의 경우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이브리드에 대한 혼다의 믿음은 해묵은 집착이 아니라 계산에 의한 미래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분위기에 휩쓸린 100% BEV 공언야말로 달콤하지만 위험한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글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