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고성능차들조차도 실린더 수를 줄인 배기량다운사이징 엔진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슈퍼카 제조사들 중에는 이런 트렌드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으며 프랑스의 슈퍼카 제조사 부가티는 극단적인 예다. 2005년에 출시된 베이론은 말 그대로 실린더 개수가 16개나 있는 W16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놀라움이다. 그런데 사실 베이론에는 16기통 보다 더 큰 18기통 엔진이 장착될 예정이었다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부가티가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실패했던 시도를 파헤쳐본다.
시작부터 남달랐던 부가티, 그 영욕의 세월
페라리의 성능과 롤스로이스의 고급스러움을 갖춘 제조사로 유명한 부가티는 자동차 디자이너였던 에토레 부가티가 1909년 설립한 프랑스의 하이엔드 슈퍼카 제조사다. 1910년, 첫 번째 양산차 겸 경주용 차량인 타입 13을 발표했고 1911년에는 르망 24시에 첫 출전해 2위를 차지했다. 이후 20세기 초반의 그랑프리와 르망 24시 등 각종 모터스포츠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부가티는 1934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로 명성이 자자한 타입 57을 공개했다. 이 자동차는 에토레 부가티의 아들 장 부가티가 개발한 차량으로 움직이는 예술 작품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 디자인이 특징이다. 당시 이 차는 딱 4대 밖에 생산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그 중 한 대는 2차 세계 대전 도중 소실됐다. 나머지 세 대 중의 하나는 패션 브랜드로도 유명한 랄프 로렌이 소유하고 있다. 랄프 로렌의 타입 57은 약 4,000만달러(한화 약 478억원)에 거래되어 가장 비싼 차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참고로 현재는 2014년에 페라리 250 GTO가 약 5,200만달러(한화 622억원)에 판매되며 순위가 바뀌었다. 이 밖에도 부가티는 1939년 부가티 100P라는 경주용 비행기를 제작해 비행기 레이스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공황과 2차 세계 대전 등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계속 고급스럽고 값비싼 차량들만 고집하다 결국 1963년 파산했다. 부가티가 부활한 것은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87년, 부가티는 이탈리아의 사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를 만나면서였다. 아르티올리는 람보르기니의 디자이너를 영입해 부가티 EB110을 출시하는 등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아르티올리마저도 10년만에 손을 들게 되고 결국 1998년 폭스바겐 그룹에게 합병되고 만다.
현실로 나온 W16 쿼드터보 엔진
2005년에 공개한 부가티 베이론 EB 16.4는 폭스바겐 그룹의 모든 기술들을 총동원해서 제작한 하이퍼카다. 8.0리터 쿼드터보 W16 엔진을 탑재해 1,001ps의 최고출력과 127.6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하며 최고속도는 407km/h였다. 참고로 2005년 당시 플래그십 슈퍼카들은 12기통 엔진을 주로 사용했으며 과급기도 트윈 터보 차저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부가티 베이론의 엔진은 정말 황당한 성능이었다.
W16 엔진은 폭스바겐을 대표하는 엔진인 VR 엔진을 개량한 것이다. VR 엔진은 V형 엔진과 직렬형 엔진의 장점을 조합한 엔진이다. 통상 실린더 블록이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인 직렬형 엔진은 후륜 구동 기준으로 차량을 설계 할 때 엔진이 길어 실내 공간을 침범한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V형 엔진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기 때문에 실내 공간 활용성은 높지만 엔진의 폭이 넓어 과급기와 각종 센서 등 다양한 장치들이 들어갈 공간이 협소하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그래서 폭스바겐은 엔진의 뱅크각을 15도로 줄여 엔진룸 공간은 물론과 실내 공간까지 모두 확보했다. 참고로 일반적인 V형 엔진은 60~90도의 뱅크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VR엔진은 실린더 헤드도 한 개뿐이라 제작 단가도 줄일 수 있다. V형과 직렬형 그리고 VR엔진은 아래의 그림과 같다.
W16엔진의 경우 폭스바겐이 베이론에 탑재하기 위해 제작한 4.0리터 8기통 VR엔진, VR8 엔진 2개를 V형 엔진처럼 뱅크각 90도로 붙여서 만들었다. 여기에 폭스바겐 그룹은 터보차저를 무려 4개나 장착했다. 이런 시스템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특수 제작된 라디에이터도 10개에 달했다. 참고로 1991년 출시한 베이론의 전신 부가티 EB110도 3.5리터 V12엔진에 터보차저를 4개 장착해 612ps의 최고출력을 발휘했었다. 그 결과 W16엔진을 탑재한 부가티 베이론은 2005년 양산차 최초로 400km/h의 벽을 넘으며 기네스북에 올랐다.
베이론이 18기통으로 출시될 뻔했다고?
그런데 베이론은 사실 16기통 엔진이 아니라 18기통 엔진을 탑재할 뻔했다. 이름부터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6.3리터 W18 엔진은 최고출력 555ps, 최대토크 66.2kg·m를 발휘하며 이론상 최고속도 350km/h까지 달릴 수 있는 엔진이다. 1,000ps가 넘는 하이퍼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낮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포뮬러 원 머신의 최고출력이 700ps 언저리였으며 90년대 가장 빠른 양산차 맥라렌 F1 GT가 최고속도가 386km/h였다.
부가티의 W16엔진이 베이론에 사용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VR8엔진 2개를 붙여 제작했다면 W18엔진은 기존에 폭스바겐 그룹에서 사용하는 6기통, VR6엔진 3개를 붙여서 만든 엔진이다. 참고로 벤틀리 및 폭스바겐 그룹 내 플래그십 차량에 사용되는 W12 엔진은 VR6엔진 2개를 붙인 것이다. 그래서 정면에서 W18 엔진을 바라보면 뱅크가 V자 형태가 아닌 W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DOHC방식을 사용해 벨브의 개수는 무려 72개나 되어 복잡한 형상을 하고 있으며 무게도 315kg으로 매우 무거웠다. 예컨대 같은 그룹의 슈퍼카 람보르기니에 탑재되는 6.5리터 V12엔진의 무게가 235kg이고 양산차 최대 배기량을 자랑하는 바이퍼의 8.4리터 V10엔진은 290kg이다. 또한 초경량 스포츠카 BAC 모노의 공차중량이 540kg으로 그 차이가 225kg 밖에 나지 않는다.
혁신적인 엔진이었지만 구조상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엔진이기도 했다. VR6엔진 3개를 붙인만큼 실린더와 밸브의 개수가 많아 지면서 엔진의 타이밍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구조적으로 기어와 제어 장치들도 복잡해 메커니즘 면에서도 문제가 많았으며 내구성도 약했다. 당연히 엔진의 크기가 크고 무거워 무게 당 출력비가 나빴다. 또한 갈수록 강화되는 환경 규제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생산 단가였다. W16 엔진을 사용한 부가티 베이론도 생산단가가 너무 비싸 차량을 팔 때 마다 엄청난 금액의 손해가 발생했는데, W18 엔진은 그보다 더 했다. 그래서 폭스바겐과 부가티는 결국 W18 엔진을 상용화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고 W18 엔진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물론 18기통 엔진이 아예 그 선례가 없었던 미답의 영역인 것은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항공기에도 장착되었으며 1967년 페라리가 프로토타입 포뮬러 원 머신에 3.0리터 W18 엔진을 탑재한바 있다. 그리고 1990년대 부가티가 W18엔진 상용화에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와 고집이 있었기에 세계 최초로 490km/h까지 달릴 수 있는 W16 엔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글
정휘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