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의 제왕 스털링 모스, 전설이 막을 내리다

지난 4 12일 모터스포츠의 전설, 스털링 모스가 세상을 떠났다. 스털링 모스는 지난 2000, 잉글랜드 모터스포츠의 위상을 높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지만 잉글랜드라는 국적에 가두기엔 그 존재감이 큰 인물이었다.  포뮬러 원과 르망 24시 등 여러 경기에 출전했다. 특히 포뮬러 원의 그 시작을 함께했으며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포뮬러 원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다. 포뮬러 원 챔피언십 우승이 없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관의 제왕이라 불렸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더욱 특별하게 기억되어 온 인물, 스털링 모스 경의 일대기를 잠시 돌아본다.

의외로 레이싱 명가 출신, 스털링 모스

스털링 크로퍼스 모스(Stirling Craufurd Moss)1929917, 런던의 웨스트 켄싱턴에서 태어났다. 모스는 유태계 가문이었는데 스털링 모스의 조부가 성을 모세스(Moses)’모터스포츠에에서 모스(Moss)’로 고쳤다. 집안이 유복해던 덕에 스털링은 부족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인 알프레드 모스는 치과 의사였으며 가족들은 템즈 강둑의 대저택에 살았다.

어린 스털링은 여러 학교와 대학을 전전했지만 공부에는 큰 뜻이 없었다. 대신 아마추어 모터스포츠 대회에서 우수한 활약할 펼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그러나 집안, 특히 부친 알프레드 모스가 크게 반대했다. 그는 1920년대 레이싱 드라이버로 활약했는데 자동차 경주가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본인처럼 치과의사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스털링 모스는 자신의 힘으로 모터스포츠에 출전해 여러 번 우승하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스털링 모스는 19세이던 1948년 쿠퍼 500을 타고 포뮬러 3에 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모터스포츠에 입문했다. 32세가 되던 1961년까지 르망 24시 및 포뮬러 원 등 다양한 모터스포츠에 참가했으며 출전기록은 총 529번에 달했고 212번 포디움 가장 높은 곳 올랐다.

그러나 그는 포뮬러 원 챔피언십 타이틀을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비운의 드라이버 혹은 무관의 제왕이었다. 그러나 스털링 모스의 가치는 우승만으로 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운전 실력에 있었고 따라서 메르세데스와 마세라티 등 여러 제조사에서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슈퍼카에 스털링 모스의 이름을 사용한 까닭?

많은 대회에 참가하고 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스털링 모스의 이력 중 특별히 기억될 레이스는 언제였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1955년에 있었던 밀레 밀리아(Mille Miglia)경주라고 한다. 밀레 밀리아는 1,597km를 완주해야 되는 경주로 스털링 모스는 722번이라고 적혀있는 메르세데스벤츠 300 SLR을 타고 10시간 7분만에 완주 하며 2등과 32분차이로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메르세데스벤츠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6년 메르세데스벤츠 SLR 맥라렌 722에디션과 2009년 메르세데스 맥라렌 SLR 스털링 모스 로드스터를 선보이기도 했다.

또한 스털링 모스 하면 로터스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1961, 스털링 모스가 로터스 소속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1.5리터 V6엔진을 얹어 압도적인 출력을 자랑하던 페라리를 상대로 압도적 우승을 차지했다. 심지어 로터스의 머신은 페라리에 비해 출력도 부족했는데 우수한 드라이빙 스킬로 이를 극복했다. 물론 그와 함께 활약하던 선수들이 절대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당시 스털링 모스와 경쟁을 펼치던 드라이버들로는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알베르토 아스카리, 잭 브라밤 등 전설로 불리는 또 다른 인물들이었다.

이처럼 언제나 승리할 것만 같았던 스털링 모스지만 1962년 굿우드에서 열린 글로리 트로피 대회에서 펜스에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고 이로 인해 신체의 왼쪽이 마비되는 상황까지 왔다. 다행히 1년만에 건강을 회복했지만 이 후 복귀 경주에서 기존 자신의 기록 보다 훨씬 느린 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스털링 모스는 자신의 몸 상태를 깨닫고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후에도 소소한 레이스에 참가 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2011년까지 나스카를 비롯한 여러 모터스포츠의 해설을 맡았다.

“스털링 모스 경(Sir. Stirling Moss)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 1960년대 당시 스털링 모스는 연봉이 가장 높은 드라이버였다. 그가 1961년 정점에 있을 때 받았던 연봉은 3만 파운드였다. 이는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70만 달러 수준이 되는데 이를 다시 한화로 환산하면 106,000만 원 수준이다. 참고로 현재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 루이스 해밀턴이 4,500만파운드(한화 630억원)인데 그보다 훨씬 적어 보이지만, 해당 시기 경제 규모 대비 연봉의 가치를 고려하면 스털링의 연봉은 어마어마한 가치였다. 특히 당시 영국이 경제적으로 무척 곤궁한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 가치는 높다.

스털링 모스는 금전적으로뿐만 아니라 명예적인 측면에서도 영예를 누렸다. 1990년에는 세계 모터스포츠에서의 후진 양성에 기여한 공로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10년 후 2000년에는 그의 조국인 영국에서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참고로 스털링 모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릴 당시 여왕이 호주를 방문하던 중이었기에 찰스 왕세자가 대신 업무를 수행했다. 이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근위병이 당신이 스털링 모스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그는 아니, 스털링 모스 경()이요라며 받아쳤다고 한다.

편히 쉬세요, 전설 스털링 모스 경(卿).

메르세데스 AMG F1 루이스 해밀턴

만년의 그는 자서전 <나의 레이스 인생(My Racing Life)>를 전기 작차 사이먼 테일러와 함께 집필하는 등, 명예로운 베테랑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노령으로 인한 지병은 그의 시간을 재촉했고 2016년 심각한 폐렴 증세로 싱가포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후 증세는 호전과 악화를 거듭하며, 전형적인 노환의 상태를 보이다가 결국 2020 4 12,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터스포츠의 시작을 함께 해왔고 은퇴 후에도 후배들을 위해 활동한 스털링 모스, 온갖차도 진심으로 스털링 모스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그는 영원히 기억될 모터스포츠의 진정한 전설이다.

국제자동차연맹 회장 장 토드



정휘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