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국가가 짓밟은 가능성, 기아기연을 기억하십니까

20197,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 보복 조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으로 시작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본격화한 지 대략 만 1년을 앞두고 있다. 그전부터도 악화하는 분위기에 따른 국지전은 있었지만 7월 하순부터 전면전으로 번졌고, 적지 않은 일본 제품 수입, 유통사들이 타깃이 됐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대체될 수 없는 재화들이 있었다. 카메라, 내시경을 포함한 광학 기기, 첨단 소재 및 특허 분야 그리고 2륜차다. 특히 그렇지 않아도 성장세이던 배달 플랫폼 비즈니스는 COVID-19 사태로 언택트가 새로운 서비스 표준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2륜차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일본 브랜드들의 자연스런 양적 성장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불매운동이 1년여를 바라보면서 기류 변화도 감지된다. 초기, 불매운동의 거센 불길 속에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불매 강요 거부의 목소리 그리고 뷔페식 불매에 대한 반감에 대한 회의론이다. 불매운동을 적용할 대상을 뷔페식으로 골라야만 하는 건 당연히 한국의 산업이 승부를 걸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2륜차는 그 대표적인 불매 비선택 메뉴다.

수 년째 한국의 2륜차 시장 규모에 대해서는 핑크빛 전망이 제기돼 왔다. 실제 판매량도 증가하고 다양성도 확대되는 추세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메시지다. 하지만 반면에 이 성장 가능성이 높은 시장에서 한국의 기술축적이 부재하는 결과는 뼈아프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꼽힌다. 자동차 이용자와 2륜차 이용자들의 이해와 공감대 부족, 입법부와 행정부의 해당 분야 연구 미비 및 무지 등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유들은 개선이 가능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감대는 생길 것이다. 적어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뤘다 자부하는 한국 사회에서라면 가능할 것이다. 공공부문의 해당 분야 무지 역시 해당 분야에 관심을 가진 인력들이 충원되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조금이겠지만.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이, 잘못 꿴 첫 단추에 있다면? 미래를 바꿀 능력은 그 어떤 미약한 인간에게도 주어지지만 과거를 바꿀 힘은 신에게도 없다. 현재 한국 2륜차 산업의 독립기술 부재라는 현 상황이 가리키는 시원(始原), 다름아닌 1981년, 제5공화국 무소불위의 싱크탱크+권력집합체인 국보위가 주도하고 강행한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즉 자동차 산업 통폐합을 가리킨다.

무지와 폭력을 베이스로 한 거대한 국가 권력,
한국 동력산업 다양화 토대에 잿물 뿌린 것

에너지 파동을 극복할 방법을 자동차 제조사별로 만들 수 있는 차종을 국가가 정해주는 식으로 타개하겠다는 생각은 아무리 시대적 역량을 감안하더라도 정신 나간 조치였고 좋게 봐줘도 저능한 짓이었다. 이 때문에 선진국들이 놀랄 정도로 성과를 보이던 주요 차종들이 하루아침에 단종되는 결과를 낳았다. 기아자동차의 브리사가 대표적인 피해 차종이다.


[오피니언] 국가가 짓밟은 가능성, 기아기연을 기억하십니까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의 브리사. 높은 국산화율과 우수한 디자인으로 인기가 높았음에도 강제 단종됐다

심지어 이 조치는 한 기업이 공들여 개척했던 사업영역을 다른 기업에 떠넘기는 만행도 포함했다. 여기서도 기아라는 이름은 피해자로 등장한다. 자전거로 시작해, 1975년부터 일본 혼다와의 합자회사 기아기연을 설립하고 2륜차 연구와 개발에 매달렸는데, 해당 산업을 대림 공업에 넘겨야 했다. 형식은 모기업인 기아산업이 포기했다는 것이었지만 당시 정부의 일방적인 업무분장에 의한 피해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기아기연은 1979년 상당한 수준의 2륜차 부문 기술 발전을 이뤘다. 혼다는 약속대로 기아기연이 어느 정도의 기술 독립 토대를 확보하면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물러났다. 나름대로 희망이 자라기 시작할 때 일어난 참극이다.

무지와 독단에 선의를 더한다고
나쁜 정책까지 좋게 변하진 않는다

돌이켜보면 당시 정부가 저질렀던 여러 가지 오판 혹은 만행은 정부가 경제 활동의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만용에 당시 권력자들의 탐욕이 더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거기서 탐욕이 선의로 바뀌었다면 상황이 긍정적으로 달라졌을까? 일치 단결됐다고 포장되는 국민의 힘과, 정부를 향한 전폭적인 지지와 선의의 결합이 이런 오판을 바른 결과로 움직일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그 가능성은 낮다. 경제라는 생물의 혈액은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은 이성적이지 않으며 흐름을 갖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 흐름은 적어도 자체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모순까지 품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온갖 곡절 속에서도 기아기연이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듯 말이다. 그러나 그 욕망을 권력이라는 규격으로 통제하고자 하면 더 큰 모순이 생긴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 분야에 마구잡이로 적용됐던 합리화 조치는, 그 모순을 해결하려 여러 부가 조치를 남발해야 했고 그럴수록 효력은 미미해졌으며 국민들의 고통은 커졌다.

크기와 힘만 믿는 정부와 권력
자동차산업에도 예외일까

무지와 아집과 폭력으로 뭉쳤던 과거 권위주의 정부의 잔재는 비교적 많이 지워졌지만, 상처는 남았다. 세계 10위권의 자동차 제조사를 보유하고도 미미한 국산 2륜차 산업의 현주소가 그것이다.

2륜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기아기연이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퇴임한 한 수입차 제조사의 전임 회장의 과거 커리어를 살피면서였다. 그의 파란만장한 역정 속에서, 크기와 힘을 믿었던 오만한 정부가 남긴 상흔이 비쳤다그 상흔에 작금 여러 가지 경제 정책의 그림자까지 오버랩되는 게 착각일까?

지금 정부는 부동산 부문에서 20개가 넘는 규제 대책을 시리즈로 발표하고 있다. 또 다음 ‘탄’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부동산 문제는 국토교통부 관할이고, 이 부처에는 다름아닌 자동차 산업도 들어가 있다. 부동산 문제라는 큰 이슈에 묻혀서 그렇지, 자동차 부문에서도 이런 정책적 오판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제발 이 모든 ‘의견’이 기우이길 바란다. 


한명륜 기자

※ 개별 기자의 오피니언입니다. 온갖차는 정론지(政論誌)가 아니므로,
특정 의견의 통일을 기자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