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동차 산업 초기에는 자동차 제조 기술뿐 아니라 자동차 디자인을 담당할 국내 인력도 부족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2000년대 다수의 국내 차량들이 해외의 자동차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디자인 되었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를 디자인한 해외 디자인 스튜디오는 크게 3개로 볼 수 있는데 그루포 베르토네, 피닌파리나, 이탈디자인 쥬지아로가 있다.
세 기업 모두 이탈리아 기업이며 카로체리아 혹은 코치빌더라고 불리는 기업들이다. 또한 이들은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의 번성을 이룬 주역들이며 특히 피닌파리나는 페라리와 정식으로 파트너쉽을 맺어 테스타로사, 엔초페라리 등 페라리의 다수 모델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계적인 기업들이 디자인한 한국 자동차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자.
카로체리아를 낳은 카로체리아, 그루포 베르토네
그루포 베르토네는 1912년 마차/수레 공방 출신인 지오반니 베르토네(Giovanni Bertone)가 설립하였다. 아들 누치오 베르토네가 1952년부터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유명해졌으며 마르첼로 간디니, 조르제토 쥬지아로(이탈디자인 쥬지아로 설립자)와 같은 차기 디자이너도 양성했다. 그루포 베르토네가 디자인한 국산차에는 대우자동차의 에스페로와 대우상용차의 차세대 트럭, 삼성상용차의 야무진이 있다.
1990년에 출시된 대우자동차의 에스페로는 국산자동차 디자인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자동차다. 단순한 디자인 의뢰가 아닌, 대우자동차 측이 스타일링 컨셉과 이미지를 정하고 그루포 베르토네에서 파견된 디자이너들과 함께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였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날렵한 이미지에 걸맞게 공기저항계수가 0.29Cd로 당시 한국 차량들 중 가장 낮았으며, 이 기록은 18년동안이나 깨지지 않았다.
1995년에 출시된 대우 차세대 트럭은 대우상용차에서 독자개발한 첫 모델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및 고유모델 대형트럭이다. 트럭의 캡 부분은 그루포 베르토네가 디자인한 것이 최종 확정되었으며 모델명과 같이 차세대 다운 획기적인 캡 디자인이 적용되었다. 획기적인 캡 디자인과 뛰어난 편의사양, 우수한 연비 등으로 경쟁 모델들의 판매량을 가볍게 앞질러 나갔다.
1998년에 출시된 삼성상용차의 최초이자 마지막 1톤트럭인 야무진은 닛산 아틀라스 100, 150트럭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차량이다. 전면부만 그루포 베르토네가 디자인 하였다. 그러나 1톤 트럭의 과적문제가 일상화됐던 한국에서 지나친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다소 억울하게 산업 폐기물이라는 오명을 얻은 비운의 차량이다.
페라리에 이어 한국 자동차까지 디자인한 피닌파리나
피닌파리나는 1930년 바티스타 파리나가 설립하였다. 1951년 바티스타 파리나의 아들 세르지오 파리나가 페라리의 창설자인 엔초 페라리와 만나 페라리와 정식으로 파트너십을 맺었다. 1960년 이후에는 GM, 볼보, 미쓰비시 등 다양한 브랜드의 자동차들을 디자인했었다. 국내 브랜드의 자동차도 디자인하였는데 현대자동차의 라비타와 GM대우의 레조, 라세티가 있다.
2001년 국내에 출시된 현대자동차의 라비타는 당시 페라리의 디자인 회사로 유명하던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아반떼XD 플랫폼을 기반으로 제작된 이 라비타는 국산차 최초로 계기판을 센터페시아 정중앙에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경쟁차량인 기아 카렌스, GM대우의 레조에 밀려 2006년 7월에는 한 달에 5대만 팔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카렌스와 함께 라비타를 숨도 못 쉬게 한 GM대우의 레조는 2000년에 출시하였으며 1995년에 피닌파리나와 공동으로 제작한 콘셉트카가 양산차로 개발이 이루어진 차량이다. 이 컨셉트카는 1997년 서울모터쇼에서 “타쿠마”라는 이름으로 공개했었다. 누비라의 플랫폼을 사용했었고 당시 7인승 자동차는 예외적으로 일반인도 가스차 등록이 가능해 억지로 3열 시트를 달고 출시했었다. 그 덕분에 레조 판매량의 90%가 LPG였다. 레조는 유럽 전략형으로 개발된 차량이어서 국내에선 보기 드문 신선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대우자동차의 삼분할 그릴이 마지막으로 적용된 차이기도 한 라세티는 피닌파리나와 이탈디자인 쥬지아로의 분업이 적용됐다. 2002년에 출시된 라세티는 세단과 스테이션 왜건의 외부 디자인을 피닌파리나가 담당했었고 해치백 모델은 이탈디자인 쥬지아로가 담당했었다. 경쟁 모델이었던 아반떼 XD에 밀려 2004년에 빠른 페이스리프트를 진행하였다. 페이스리프트 된 뉴 라세티는 대우의 패밀리 룩이었던 삼분할 그릴이 사라졌고 그릴에 삽입되던 로고 또한 GM대우의 것으로 바뀌었다.
한국 자동차를 가장 많이 디자인한 이탈디자인 쥬지아로
이탈디자인 쥬지아로는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1968년에 설립한 디자인 및 엔지니어링 기업이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21세에 피아트에 스카우트 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자동차 뿐 아니라 독일, 일본, 미국 등 다양한 브랜드의 자동차들을 디자인하였다. 국산 자동차도 다수 디자인 했었는데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의 여러 모델들을 디자인했었다.
각각 1975년, 1985년에 출시된 포니와 포니엑셀은 이탈디자인 쥬지아로가 디자인한 국산차로 유명하다. 포니는 현대자동차의 첫 독자생산 고유모델이자 대한민국 자동차 최초의 독자생산 모델이다. 포니 4도어, 포니 3도어 그리고 콘셉트로만 남은 포니 쿠페를 이탈디자인 쥬지아로에서 디자인하였다. 포니 엑셀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륜 구동 승용차다. 이전 모델인 포니 3도어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차량으로 세단 모델인 ‘프레스토’도 있었지만 해치백 모델인 포니 엑셀만 이탈디자인 쥬지아로에서 디자인하였다. 1986년에는 ‘포니를’ 떼고 ‘엑셀’로 모델명을 변경하였다.
스텔라는 1983년에 출시한 후륜구동 중형차이다. 쏘나타 1세대와 코드명이 Y1로 동일한데 1세대 쏘나타가 스텔라의 고급형 버전으로 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탈디자인 쥬지아로에서도 스텔라와 1세대 쏘나타는 같은 차량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탈디자인 쥬지아로 홈페이지에 있는 포트폴리오에도 스텔라만 등록되어 있고 쏘나타 1세대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1988년에 출시한 2세대 쏘나타는 1세대 그랜저의 전륜구동 플랫폼을 공유한다. 덕분에 차체와 실내 크기가 커져 경쟁 모델인 기아산업의 콩코드와 대우자동차의 로얄 프린스를 압도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형세단으로 발돋움하였다. 2세대 쏘나타이지만 차기 모델의 이름이 쏘나타2로 출시가 되어 쏘나타1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탈디자인 쥬지아로의 마지막 손길을 받은 현대자동차다.
1998년에 출시된 마티즈는 대우자동차의 경차이다. 마티즈의 디자인 모티브는 피아트 친퀘첸토 루치올라 콘셉트카다. 이탈디자인 쥬지아로가 피아트를 위해 콘셉트카를 제안했지만 피아트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대로 사라질 뻔 했으나 대우자동차가 디자인을 구매하여 개발 및 생산을 하였다. 귀여운 디자인으로 대우자동차의 대표 효자상품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1998년에는 ‘디아트(d’Arts)’라는 한정 판매 모델을 출시하였다. 디아트도 이탈디자인 쥬지아로의 작품이다.
대우자동차의 라노스는 1996년에 출시되었으며 이전 모델인 씨에로의 1년치 판매량을 2달만에 따라잡는 쾌거를 보이기도 했다. 출시 초기에는 세단 모델만 판매했으나 이듬해 3도어 해치백, 5도어 해치백 모델을 추가로 출시하였다. 이탈디자인 쥬지아로의 손길을 받은 모델은 세단 모델과 5도어 해치백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