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아바스, 독을 든 남자

방패 문양 안에 전갈 한 마리가 자리한 로고. 바로 아바스다. 작은 몸집에 비해 맹독을 품고 있는 전갈은 아바스의 성격과 매우 닮았다. 창립자의 칠전팔기와도 같은 정신으로 탄생한 아바스는 설립 후 반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독을 지니고 있다.

레이서였던 엔지니어
1908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카를로 아바스(carlo abarth 이하, 카를로)는 어린 시절부터 기술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16세가 되던 해에 이탈리아에서 자전거와 모터사이클 섀시를 만드는 일을 했고, 이탈리아에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19세에 다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모토 툰 모터사이클(Motor Thun Motorcycles)에서 레이스 모터사이클을 제작하는데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테스트 라이더로서도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마침 동료 직원이 아파서 레이스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카를로가 대신 레이스를 하게 됐고, 카를로는 우수한 랩 타임을 기록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상황을 지켜볼 수 없던 탓인지, 카를로의 실력을 인정하기 보다는 동료 직원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게 됐다.

이들의 시기와 질투는 결국 레이스 당일 벌어졌다. 카를로는 경기 중반에 기계적으로 결함이 있던 모터사이클을 타도록 강요 받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카를로는 모토 툰에 자신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난다. 회사는 떠났지만 레이스의 묘미를 알게 된 카를로는 20세가 되던 1928,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레이스에서 생에 첫 번째 우승을 따낸다. 이 후 카를로는 2년 동안 유러피언 챔피언을 다섯 번이나 거머쥐며, 레이서로써 큰 활약을 펼친다. 이 때 카를로의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에게 불행이 찾아온다. 1930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레이스 도중 심각한 사고를 당한 것이다. 부상으로 인해 레이서로서의 삶에 차질이 생겼지만, 그의 경쟁심 넘치는 정신력은 나락으로 떨어진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잊고 있던 엔지니어의 재능을 살려 사이드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3년 자신이 만든 사이드카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Orient Express)와 비엔나(Vienna)에서 오스텐드(Ostend)까지 약 1,300km에 달하는 구간에서 시합을 하게 된다. 비록 1차 레이스에서는 전기적인 결함으로 실패했지만, 2주 후 약 20분의 시간차를 두고 승리를 거머쥔다. 이렇듯 카를로는 자신의 재능을 아낌 없이 발휘하며 도전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카를로는 사고 후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듯 했으나 다시 한번 시련을 맞이한다. 1939년 카를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전보다 더욱 심각한 사고를 당하게 되고 결국 1년이 넘는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당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카를로는 류블랴나(Ljubljana, 슬로베니아의 수도)의 한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당시 휘발유가 부족한 시기였던 터라 등유를 이용한 엔진을 만드는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
2차 대전이 끝난 후 카를로는 이탈리아로 완전히 넘어온다. 카를로의 본명은 칼 알베르토 아바스(karl alberto abarth)였지만, 이 때 이탈리아에 정착하면서, 독일어 발음인 칼을 이탈리아 발음인 카를로로 바꾸게 된다.
 
카를로는 포르쉐 가문의 옛 친구와 교류를 하면서 포르쉐 디자인 스튜디오 내의 이탈리아인 대표를 맡았다.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레이서인 타치오 누볼라리(Tazio Nuvolari), 사업가였던 피에로 두지오(Piero Dusio), 오스트리아 출신의 엔지니어인 루돌프 흐루스카(Rudolf Hrushka)와 함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에게 자동차 제작을 의뢰한다. 그것은 바로 치시탈리아360(Cisitalia 360)이었다.

그러던 중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독일의 나치당원과 연관된 이유로 기소가 되고, 그의 아들인 페리 포르쉐가 아버지를 석방시키기 위해 치시탈리아 프로젝트에 쓰일 돈을 대거 사용했다. 결국 치시탈리아 프로젝트는 무산되고 만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카를로는 결국 이탈리아 출신의 레이서인 귀도 스카글리아리니(Guido Scagliarini)와 함께 아바스 & C. SrL(Abarth & C. SrL, 이하 아바스)를 설립한다. 아바스의 로고는 카를로의 별자리인 전갈을 채용했다.

카를로는 스쿠아드라 아바스(Squadra Abarth)라는 자체 레이싱 팀을 꾸리고 당시 유명 레이서였던, 타치오 누볼라리, 보네또, 코르테세, 듀베르티 등을 영입해 다양한 레이스에 출전했다. 회사 설립 후 처음 제작한 204 A 로드스터는 이탈리아 1100 챔피언십과 포뮬러2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카를로는 엔지니어 재능과 레이서 출신의 경험을 살려 레이스 자동차용 배기 시스템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마케팅에도 힘썼으며, 높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상품성을 인정받아 성공적인 판매를 이뤘다. 덕분에 알파로메오, 페라리, 마세라티 등 자동차 제조사들에게도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1952년에 페라리 GT와 각종 레이싱 자동차에 배기 시스템을 공급하게 된다.

그리고 1955, 카를로는 피아트600을 가지고 보다 작은 합리적인 스포츠카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에 따라 흡/배기 시스템은 물론 라디에이터, 크랭크샤프트, 피스톤 링, 카뷰레터, 워터 펌프 등 전반적인 튜닝 제품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자체 튜닝 회사로 입지를 굳힌 아바스는, 1956년에 이탈리아의 자동차 디자인 회사인 베르토네(Bertone)가 디자인한 피아트750을 튜닝하게 되고, 몬자 레이스에서 기록을 세운다. 3,743km의 거리를 평균 155km/h의 속도로 24시간을 완주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내구 레이스에서 여러 기록을 세우며 독일의 잡지 커버에도 실리는 등 큰 이슈를 만들었다.

그리고 1958년 카를로는 명작 하나를 탄생시킨다. 피아트의 단테 지아코사(Dante Giacosa)가 디자인한 피아트500이 출시하게 되는데, 이는 합리적인 가격과 단순한 차체 구성을 갖고 있었다. 카를로는 479cc 엔진의 압축비를 끌어올려, 13마력에서 26마력까지 높였다. 이 피아트500 아바스는 18,186km의 거리를 평균 108km/h의 속도로 완주하는 내구성을 보여줬고, 식스 인터내셔널의 기록을 거의 날마다 갱신했다. 이를 계기로 카를로는 소형차가 빠르면서도 안정적인 레이싱카로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했고, 아바스는 작지만 강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같은 해, 아바스는 피아트와 파트너십을 맺고 더욱 강력한 회사의 기강을 만들게 되며 승승장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열정으로 정상을 향하다
아바스의 황금기라 할 수 있던 1960년대. 아바스는 퍼포먼스와 승리를 위한 대명사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투어링 대회를 위해 제작한 아바스850TC(Turismo Competizione)는 르망24, 유럽 투어링카 챌린지( ETCC), 뉘르부르크링 레이스 등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자동차 제조사인 심카(simca)와 파트너십을 맺고 심카1000, 심카1300 등을 탄생시킨다. 여전히 피아트와도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는데, 보다 큰 배기량으로 교체된 피아트500(595cc)의 성능을 끌어올리고, 더 강력한 버전인 595SS 등도 제작하며 완성도를 더욱 높여갔다. 

1965년 카를로는 트랙으로 복귀하여 기록적인 성과를 남긴다. 몬자에서 열린 드래그 레이스에서 피아트1000아바스로 해당 클래스에서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바로 다음 날, 더 높은 클래스에서도 승리를 차지한다. 이 때 카를로의 나이는 57세였다. 카를로는 트랙으로 복귀해 간간히 레이스를 하면서도 아바스1300OT, 아바스1000SP, 아바스2000 스포츠스파이더 등의 뛰어난 작품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냈다. 이렇게 상승 곡선을 멈출 줄 모르는 아바스의 독주를 막기 위해 레이스 협회 등에서 여러 방책을 강구했지만, 이들의 승리는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레이서 출신이었던 카를로의 열정이 기업에 방해가 됐던 것일까. 카를로의 경영 방침은 이익 보다는 우승하기 위한 것에 더 가까웠다. 결국 자금난을 겪게 됐고, 1971 8월 피아트와 합병한다. 그리고 피아트는 아바스의 구조를 재편했다. 또한 랠리 경기에 매진하게 되며, 오토비앙키 A112 아바스(Autobianchi A112 Abarth), 124아바스 랠리(124 Abarth Rally), 131아바스 랠리(131 Abarth Rally)등으로 각종 랠리 경기에서 수 많은 타이틀을 따낸다.
 
그러나 피아트와 합병한 8년 뒤인 1979, 카를로는 71세로 생을 마감한다. 카를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 10개의 세계 기록과 133번의 국제 기록, 그리고 수많은 우승을 남겼다. 엔지니어이자 레이서였던 카를로는 뼈 속까지 열정이라는 독을 품고 있던 사람이었고, 승리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정신은 아바스의 브랜드 정체성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데 아주 큰 거름이 됐다.

아바스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트는 2007년 아바스를 다시 부활시켰고, 과거 카를로가 남겼던 업적과 그가 설립 당시 강조했던 합리적인 가격에 작은 크기를 가졌지만 화끈한 성능의 자동차를 만들자는 철학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섰던 카를로는, 맹독을 품은 전갈처럼 모터사이클과 자동차 역사에 짙은 업적을 남겼다.


크레딧
조의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