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제토 주지아로(이하 G. 주지아로)는 이탈리아 태생의 산업 디자이너이다. 1968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디자인 회사인 ‘이탈디자인 주지아로’를 설립해, 카메라와 전자제품, 화장품 용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산업 디자이너로서 그의 정체성은 자동차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의 디자인 영역은 로터스와 같은 세계적 위상의 슈퍼카에서 폭스바겐의 골프, 현대자동차의 포니 등 대중지향적 양산차까지 아울렀으며, 많은 자동차 브랜드의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침 지난 8월 7일은 그의 78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8월의 태양만큼이나 열정 가득한 G. 주지아로의 자동차 디자인 인생을 되짚어본다.
G.주지아로는 이탈리아의 가레시오에서 1938년 8월 7일에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루이지 주지아로는 프레스코 기법(마르기 전 회벽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주로 종교회화에 적용)을 전문으로 한 화가였다. 유럽에서 종교 예술가의 직업은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G.주지아로의 부친인 마리오 역시 그런 경우였다. 어린 G. 주지아로는 유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예술적인 자질을 갖춘 셈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산업 발달은, 몇몇 장인에서 장인으로 이어지는 예술 작업보다 대량 생산을 위한 산업 디자인 전문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직시하고, 순수 미술적 조형과 산업 디자인 능력을 함께 연마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탈리아 국립 예술 아카데미의 야간 수업을 들으며 제품 디자인 학업에 매진했다. 특히 그는 산업 디자인의 꽃이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 이에 깊이 몰두했다. 그의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애정은 국립 예술 아카데미의 졸업 전시로 자동차 디자인을 출품했을 정도였다. 이는 그의 운명이 자동차 디자이너의 길로 급물살을 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졸업 작품을 다름아닌 피아트의 설계 총책임자인 단테 지아코사가 눈여겨 본 것이었다. 당시 지아코사는 이미 이탈리아 자동차 설계의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는 즉시 주지아로를 발탁했는데 이 때 주지아로의 나이는 17세였다.
피아트에서 실력을 쌓은 주지아로는 만 22세 때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의 또 다른 대가인 누치오(애칭,본명은 주세페)베르토네에게 발탁되어 그의 스튜디오인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에 합류한다. 카로체리아(Carrozzeria)는 자동차 공방이라는 의미로, 주지아로를 영입한 누치오 베르토네의 아버지 지오반니 베르토네가 1912년에 설립해 당시 업력이 50년을 넘은 회사였다. 후에 주지아로가 자신의 회사를 세울 때 뜻을 함께 한 엔지니어인 알도 만토바니를 만난 곳도 바로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였다.
이처럼 G.주지아로는 초기 커리어부터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 명가의 유전자를 온몸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피아트를 떠나 카로체리아 베르토네로 넘어오면서 본격적으로 피아트의 자동차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피아트에 몸담았을 때의 커리어가 그야말로 초창기 중의 초창기였음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치오 베르토네는 야심 많은 사업가였다. 특히 그는 1960년대 들어 그란 투리스모의 디자인에 큰 공을 들였다. 이는 주지아로가 디자이너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 시기 베르토네 스튜디오를 상징하는 차는 알파 로메오2600 스프린트와 줄리아 스프린트 GT, 페라리 250GT, ‘Jet’ 그리고 BMW 3200 CS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자동차들은 G.주지아로가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에 합류한 지 1~2년 사이에 수주한 기종들이었다. 따라서 G.주지아로 본인은 디자인을 주도했다기보다, 업계에서 자신보다 10년 이상 많은 연륜을 가진 선배들과 함께 작업하며, 자신의 재능을 디자인에 녹여내는 방법을 익혀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이 작업을 통한 그의 도약이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도 사실이다.
1965년 무렵이 되면서 G.주지아로는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 한 기종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로 1965년의 피아트850 스파이더를 들 수 있다. 이 자동차는 600의 성공에 고무된 피아트의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직렬 4기통 가솔린 엔진으로, 배기량도 기존 600에 비해 증가한 843cc으로 최고 출력 37hp에 125km/h의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는 자동차였다. 피아트는 세단과 쿠페를 자체적으로 디자인하고 스파이더를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에 발주했다. 주지아로는 거침없고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기존 850에서 나온 디자인이 맞나 싶을 정도의 과감한 컨버터블을 구현해냈다. 스파이더는 성능 면에서도 기존의 두 모델과 달리 최고 출력은 47hp에 달했으며 최고 속도 역시 10km/h가 더 빠른 135km/h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참고로 850의 기존 두 모델의 디자인은 단테 지아코사가 주도했다. 혹,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에서 G.주지아로가 성장하는 모습을 꾸준히 지켜보며, 옛 제자가 날개를 펼칠 시기를 조율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정황도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자동차는 그 해 제네바 모터 쇼에서 화려하게 데뷔하며 G.주지아로의 명성을 알리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다.
이후 G.주지아로는 또 다른 카로체리아인 기아(Ghia)를 잠시 거친 후 1968년에 베르토네 시절의 동료인 알도 만토바니와 함께 독립했다. 그들은 ‘스투디 이탈리아니 레알리짜지오니 프로토티피’라는 긴 이름을 지었지만 곧 오늘날과 같은 이탈디자인으로 개명했다. 여기에 본인의 주지아로 본인의 성이 붙은 것은 그 뒤의 일이다.
회사 설립 후 곧 다가온 1970년대는 G. 주지아로의 전성기이자 디자인적 변성기(變聲期)이도 했다. 초창기 피아트와 베르토네에 몸담았을 때 그의 디자인은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의 전통에 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곡선 중심이었다. 1974년, 폭스바겐 골프의 탄생은 당대 자동차 디자인계에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참고로 당시 이탈디자인의 도제 중 한 명이 후에 폭스바겐의 회장이 되는 페르디난드 피에히였다. 주지아로의 직선에 대한 탐구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탈디자인의 첫 작품인 알파로메오의 알파수드는 디테일한 부분에 남아 있는 곡선을 제외하면 상당히 골프의 디자인에 가까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골프의 대성공 이후 주지아로는 피아트에도 직선적 디자인의 유전자를 심었다. 피아트의 판다와 우노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현재 그 위상이 확고한 명차 제조사들도, 그 존재감이 미약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와같은 제조사들의 경우 기술에는 강점이 있었을지 몰라도 고유의 디자인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아무리 자동차를 좋아하는 소비자들이 있다 해도, 그들에게 주는 첫 인상은 제원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이런 제조사들은 당대 인기를 얻고 있던 뛰어난 디자이너나 카로체리아와 협업하는 방식을 택해야 했다. 로터스 역시 그런 자동차 제조사 중의 한 곳이었다. 유럽의 쟁쟁한 제조사들이 자동차의 태동기부터 가업으로 두 세대 이상을 이어져 온 것에 비하면 1970~1980년대 로터스의업력은 고작 20년을 겨우 넘던 시절이었다. 이런 로터스와 막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 주지아로의 만남은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그런 만남이 낳은 자동차가 바로 1972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인 에스프리였다. 그는 골프를 디자인할 무렵 고민하고 연구했던 직선 중심의 디자인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당시로서는 종이접기처럼 다채로운 면을 지닌 ‘폴디드 페이퍼’라는 방식을 선보였다. 여기에 팝업 타입 헤드라이트를 선택해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이면서도 매끈한 면의 미학을 완성했다.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한 콘셉트카의 옆면 바디킷에는 G. 주지아로의 디자인임을 알리는 ‘스타일드 바이 주지아로(Styled by Giugiaro)’라는 엠블럼이 부착되었다.
이 자동차 중 가장 유명한 기종은 1981년 개봉한 <007 유어 아이즈 온리>에 등장한 에섹스(Essex) 에스프리 터보라고 할 수 있다. 스키 스루를 얹은 이 자동차는 당시 영화를 관람했던 뭇 남성들에게는 여주인공 캐롤 부케 이상의 흥분을 안겨주었다. 2,174cc 직렬 4기통 엔진과 터보차저, 5단 수동 변속기를 장착한 이 자동차는 최고 출력 210hp, 최대 토크 27.6kg∙m의 성능을 발휘했다. 또한 엔진오일을 별도의 탱크에 따로 보관해 별도의 냉각이 필요 없는 드라이섬프 방식을 택했는데, 이는 F1 자동차에 적용되던 기술이었다. 후륜구동인 이 자동차는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에어로파츠와 후미의 립타입 스포일러를 통해 공기역학적인 이점도 얻으면서, 당시에 이미 0→100km/h를 6.1초에 주파했다. 그야말로 ‘본드카’다운 본드카였던 셈이다.
G. 주지아로의 손길이 닿은 명차는 수도 없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과 그의 인연이 되는자동차를 찾으라면 포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포니가 G. 주지아로의 디자인을 입고 태어난 데는 우여곡절이 컸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부품공장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여기에 토리노에 파견된 인력들은 미국의 기술 표준만 알고 있었다. 심지어 당시 개발 현장에 몸담았던 현대자동차 관계자는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는 인력조차 없었다”며 당시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어쩔 수 없이 주지아로의 디자인을 잘 알고 있는 영국 쪽으로부터 자문을 받아왔고, 포니 차체의 플랫폼은 일본으로부터 얻었다. 포니는 주지아로의 디자인을 입은 다국적 기술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의 자동차 생산 능력이 활발해지면 그의 손길이 닿은 차들이 꾸준히 만들어졌다.
그에 비하면 1990년대 그와 이탈디자인의 손길이 닿은 국내 자동차들은 상대적으로 작업하기가 수월했다. 더군다나 G. 주지아로의 디자인에 있어 시작점에 있었던 것과 같은 소형, 경형 자동차가 많았던 것도 그의 디자인 진수를 맛보는 데 적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대우자동차의 마티즈가 대표적이었다. 특히 이 자동차는 원래 이탈디자인이 피아트500의 1990년대 후속작을 만들기 위해 토리노 모터쇼에서 선보였던 ‘루치올라’ 콘셉트카를 기반으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당시 피아트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대우에서 생산을 시작해 유럽으로 수출하자 오히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국내 시장에서도 경차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 자동차는 1998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큰 인기를 누렸으니, 어찌 보면 G. 주지아로는 30년 이상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자동차 디자이너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전세계가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2002년, G. 주지아로는 조금 더 뜨겁게 이 해를 보냈다. 2002년 10월, 그는 앙드레&에두아르 미슐랭 형제, 피아트의 설립자인 아그넬리 가의 형제들과 함께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
이탈디자인은 2011년까지 800명의 직원과 연간 매출 10억 유로 이상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하지만 그는 2010년 이탈디자인 주지아로의 지분 90% 이상을 폭스바겐아우디에 매각했다. 그리고 2015년 아들 파브리지오와 함께 보유하고 있던 나머지 주식 9.9% 역시 마저 처분함으로써 완전히 이탈디자인에서 손을 뗐다.
이를 두고 그리스 디폴트, 난민 수용과 관련한 경제적 부담 등 유럽 경제 어려움의 영향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주지아로는 은퇴가 개인적 사정임을 밝히며 경영난에 대한 추측을 일축했다. 오히려 주지아로는2015년 말까지 250명 정도의 추가 채용이 있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실제 2016년 초까지도 각 분야의 인력을 모집하며 이탈디자인은 그 약속을 지켰다. 오너가 떠나도 명가는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