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는 솜씨 좋은 장인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피그말리온은 조금 독특한 존재다. 그는 신도 탐낼 솜씨에다. 자신의 애정과 숨결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어 생명력을 부여했다. 오죽하면 그가 아름다운 여인을 ‘3D’로 만들었더니 ‘실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서는 바로 세르지오 피닌파리나가 피그말리온을 닮아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뛰어난 디자이너는 많았지만,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만큼 자신의 애정과 그 만족을 위해 디자인한 이도 드물었다. “아름다운 자동차는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 언제나 아름답다”에 담긴 그의 애정은 차라리 에로스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무더운 여름에 떠났으니, 이번 여름 휴가엔 그의 생명력 넘치는 자동차 디자인 세계와 삶을 한 번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지난 2014년 12월, 아부다비에서 펼쳐진 페라리 최고의 연례 행사인 페라리 피날리 몬디알리에 특별한 자동차가 등장했다. 바로 이탈리아의 디자인 회사 피닌파리나와 페라리의 협업 60주년을 기념하는 모델인 ‘페라리–세르지오’ 1호차였다. 페라리 세르지지오는 그가 페라리의 디자인을 도맡던 1970~1980년대의 디자인을 반영했으며 최고출력 605마력에 배기량 4497cc의 V8엔진을 탑재해 100km/h까지 3초 만에 도달하는 출력을 발휘한다.
피닌파리나와 페라리는 60년 동안 협업을 해 왔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다. 페라리의 주요 모델은 모두 피닌파리나에서 디자인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서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두 회사 모두 이탈리아 자동차업계를 주름잡는 회사였기에 서로 먼저 찾아가지 않겠다고 우겼고 결국 중간지점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는 아버지인 바티스타 파리나(Battista Farina)와 그 자리에 있었다. 두 회사는 그날 이후 일사천리로 협력관계가 되었고, 피닌파리나는 페라리 212를 시작으로 이후 60년 동안 페라리의 디자인을 책임졌다.
피닌파리나는 세르지오 피닌파리나의 아버지인 바티스타 파리나가 설립한 회사이다. 바티스타는 11세가 되던 해 형으로부터 자동차 관련 기술을 습득하며 관련 업무를 배웠다.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Carrozzeria Pinin Farina)라는 회사를 설립해 자신의 길을 걷게 된 것은 37세에 이르러서였다. 오랜 기간 연마한 자동차 디자인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던 바티스타 파리나는 알파로메오와 란치아, 피아트의 디자인을 수주하며 존재감을 키웠다.
독립 후 디자인한 자동차 중 그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주한 치시탈리아 사의 자동차들이었다. 치시탈리아는 1946년 설립된 경주용 자동차 전문 제조사로, 전후 유명 디자이너들에게 자동차의 디자인 및 설계를 맡기며 그 존재감을 알려가고 있었다. 그 중에는 911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도 있을 정도였다. 세르지오가 설계한 기종은 치시탈리아 202라는 기종으로, 수제 알루미늄 차체를 가진 쿠페였다. 1947년 파리 모터쇼에 선보인 이 자동차는 당시 ‘움직이는 예술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경주용 자동차의 공기역학적 디자인을 반영하되, 탑승자에게는 세단과도 같은 편안함을 줄 수 있도록 실내외를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회사는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결국 1963년에 도산했으나,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를 포함해 여러 디자이너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명차들은 자동차 역사의 유산으로 남았다.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치시탈리아 202 기종 역시, 1951년 뉴욕현대미술관에 영구 전시되는 영광을 누렸다.
1961년, 바티스타와 세르지오 부자는 이탈리아 법원으로부터 중요한 결정을 이끌어낸다. 바로 회사의 이름과 같은 피닌파리나를 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는 이탈리아 정부가 피닌파리나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 일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반니 그론치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참고로 이탈리아의 대통령은 유럽에서 대통령제를 채택한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피닌 파리나에서 ‘피닌’은 ‘작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티스타 피닌파리나가 아담한 체구를 가진 데서 기인했다. 외모를 중시하는 문화권에서는 언뜻 비하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이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성이다. 피닌파리나 역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작지만 위대한 디자인 거인의 두 번째 탄생이었던 셈이다.
피닌파리나의 창업주인 바티스타 피닌파리나가 1966년에 세상을 떠나자 1961년부터 사장직을 맡았던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직접 디자인 한 피아트 124 스포트 스파이더를 내 놓으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72년에는 이탈리아 최초로 실제 차량의 테스트가 가능한 풍동시설을 갖췄다. 이 때부터 피닌파리나는 공기역학을 고려해 안전하고 넓은 실내를 중점으로 한 디자인을 발전시켜나갔다. 또한 이후에는 독립적인 디자인 연구소를 만들었다. 이 곳은 훗날 세르지오 피닌파리나가 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을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페라리의 주요 디자인을 맡았다. 엔초페라리, 테스타로사, 250GTO 등 그의 손길을 거친 차라면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테스타로사는 페라리 역사 상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평가 받았을 정도다. 그는 페라리뿐 아니라 알파로메오, 피아트, 란치아, 푸조 등 상당히 많은 자동차 회사의 디자인을 맡으며 피닌파리나를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로 성장시켰다. 1986년에는 자동차 분야를 넘어서 건축, 인테리어, 선박, 항공 등을 담당하는 피닌파리나 엑스트라를 설립해, 제품개발과 테스트 및 생산까지 대행하며 사업 영역을 넓혔다.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는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답게 그 솜씨를 다양한 제품군에 적용시키며 ‘피닌파리나 스타일’을 구축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마세라티의 콰트로포르테를 디자인해 마세라티의 라인업을 성공적으로 변신시켰다. 콰트로포르테는 많은 언론으로부터 ‘성숙하게 화장한 얼굴로 부드럽게 시선을 던지는 여신’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르지오 피닌파리나의 능력을 또 한 번 세계에 각인시켰다.
세르지오 피닌파리나의 업적은 디자인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회사의 자동차 디자인 개발을 통해 자동차 문화 전반에서 기여한 그는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높았다. 이를 기반으로 1979년부터 1988년까지 이탈리아 및 유럽연합 의회 의원직을 맡는 등 정계에도 진출했다. 또한 1988년부터 1992년까지는 이탈리아 산업노동자연맹의 총재직을 맡기도 했다.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는 창업주가 아니지만 창업주인 부친보다 오히려 유명하다. 이는 세르지오 피닌파리나의 활동기가 자동차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은 시기였다는 배경도 작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동차 디자인에 있어, 페라리처럼 피닌파리나가 아니면 안 되는 절대적 분야를 구축한 인물이 세르지오 피닌파리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디자이너로서의 기본을 고수하되, 큰 그림 속에서 그 디자인을 볼 줄 알았던 혜안이야말로, 세르지오 피닌파리나의 삶으로부터 읽어내야 할 가치이다.
글
최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