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자동차는 시동을 걸 때, 핸들 오른쪽에 있는 키박스에 키를 꽂고 돌리거나 시동 버튼을 눌러 엔진을 깨운다. 하지만 몇몇 자동차 제조사들은 다른 제조사와 키박스의 위치를 차별화시키거나, 시동 거는 방법을 달리 만들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색다른 방법으로 시동을 거는 자동차 브랜드에 대해 알아본다.
포르쉐의 이그니션 키박스(이하, 키박스)는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위치한다. 키박스가 이 곳에 위치한 이유는 빠른 출발을 위해서였으며, 그 유래는 르망24시 내구레이스에서 시작되었다.
르망24시 내구레이스는 1971년부터 롤링 스타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그 이전에는 르망식 스타트라고 불리는 방법이 따로 존재했다. 이 방법은 경주용 자동차를 비스듬하게 일렬로 세워두고, 모든 드라이버가 일정 거리에서 대기한다. 그리고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드라이버는 자동차까지 뛰어가서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포르쉐는 문을 열자마자 시동을 걸 수 있도록 키박스를 왼쪽에 배치 해, 왼손으로는 시동을 걸고 오른손으로는 변속기를 조작해 경쟁자들 보다 빠른 출발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는 0.1초를 다투는 레이스에서 포르쉐가 강자로 등극한 비결이기도 했다.
포디움의 가장 높은 자리를 향한 이러한 열망은 포르쉐 레이스 머신들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르망24시 내구레이스와 일본 슈퍼 GT 등 여러 국제 모터스포츠에서 우수한 결과를 보이는 포르쉐의 레이싱머신인 GT3 RSR은 그 결정체라고 할 만하다. GT3 RSR은 공도 주행이 가능한 서킷 머신 포르쉐 911 GT3를 베이스로 제작되었다. GT3 RS의 RS는 레이싱 스포츠를 뜻하는 독일어 ‘렌 슈포트’의 머릿글자다. GT3 RS는 4.0리터 수평대향 6기통 엔진으로 최고 출력 493hp(8,250rpm), 최대 토크 46.9kg·m(6,250rpm)가 7단 PDK와 짝을 이룬다. 0→100km/h는 3.3초, 최고 시속은 310km/h에 달한다.
1998년식 이후의 사브를 처음 타보는 사람들은 키를 어디다 꽂아야 할지 찾아 헤맬 가능성이 높다. 사브의 키박스는 기어 노브 하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사고 시 자동차 키로 인한 무릎 부상의 위험성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둘째, 시동을 건 후 바로 기어를 선택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부분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특유의 단순함, 최소화, 실용성이 그대로 묻어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항공기 제조사답게 항공기 조종석에서 영감을 얻은 부분이다.
이러한 특징은 특별할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 한때 국내의 사브 동호회에서는 조수석의 아기, 혹은 물건이 키를 건드려 주행 중 시동이 꺼지는 위험 상황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올라오기도 했다.
2012년에 사브를 인수한 NEVS(National Electric Vehicle Sweden)는 2013년 11월에서 2014년 5월까지 사브 9-3 에어로의 생산을 재개했다. 사브라는 이름의 마지막을 장식한 9-3 에어로는 직렬 4기통 2.0리터 엔진에 터보를 얹어 최고 출력 220hp(5,300rpm), 최대 토크 35.7kg·m(2,000~4,000rpm)를 발휘한다. NEVS는 향후 발표되는 차종에 사브라는 이름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사브의 기어노브 하단의 키박스는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동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탈리아의 슈퍼카 제조사인 페라리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페라리의 시동 방식은 키를 돌린 후 버튼을 눌러야 한다. 2009년에 등장해 2015년까지 생산된 페라리 458 이탈리아 또한 턴 키(Turn key) 방식과 버튼 시동의 조합이다.
‘억’소리 나는 비싼 차 값 때문일까, 장인적 수제품의 감성을 고집해 오던 페라리도 458 이탈리아의 후속인 488GTB에는 스마트 키를 적용했다. 이제는 키를 돌리지 않고 스티어링 휠에 장착된 빨간 시동 버튼을 눌러 간단하게 시동을 걸 수 있다. 최근 출시된 페라리의 4륜 구동 GTC4 루쏘 또한 스마트키를 도입하면서, 향후 출시될 페라리 기종에서도 스마트 키를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페라리의 마지막 아날로그 시동 방식이 될 지 모르는 캘리포니아 T는 3.9리터 V8 트윈터보 엔진으로 최고 출력 560hp(7,500rpm), 최대 토크 77kg·m(4,750rpm)를 7단 DCT와 짝을 이뤄 0→100km/h 가속이 3.6초, 최고시속 316km/h를 기록한다. 캘리포니아 T는 페라리 최초의 하드탑 컨버터블인 캘리포니아에 터보엔진을 장착한 차량이다.
영화 007의 본드카로 잘 알려진 애스턴마틴도 키박스 위치가 일반 자동차와는 다르다. 애스턴마틴의 센터페시아 상단에는 버튼식 변속버튼이 P, R, N, D 순으로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버튼들의 중앙에 직사각형 키박스가 위치해 있다. 이 키박스에 키를 꽂으면 시동이 걸린다는 점은 다른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파이어 크리스탈 재질로 제작된 키의 가격이 한화로 대략 220만 원이라는 점이 남다르다.
007의 본드카로 두 번이나 등장한 DBS는 DB9의 외관에 카본 에어댐과 사이드 스커트, 대형 리어 디퓨저를 장착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연출했다. DBS는 6.0리터 V12 엔진으로 최고 출력 510hp(6,500rpm), 최대 토크 58.1kg·m(5,750rpm)을 6단 터치트로닉(버튼식)을 통해 뒷바퀴에 동력을 전달한다. 이를 바탕으로 0→100km/h 가속시간은 4.3초, 최고시속 302km/h를 기록한다. 전후륜 서스펜션은 모두 더블 위시본이이며, 세라믹 브레이크를 장착했다.
2005년에 처음 등장한 부가티 베이론의 제원은 8.0리터 W16기통의 엔진에 쿼드 터보를 장착해 최고 출력 987hp(6,000rpm), 최대 토크는 127.5kg·m(2,200~5,500rpm)를 발휘했다. 페라리와 다른 점은 시동 버튼이 사브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베이론의 키 역시 최고급차다운 유별남을 자랑하는데, 메인 키와 스페셜 키로 나뉘어져 있다.
베이론의 시동 방법은 키를 돌린 후, 시동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메인 키는 일반 시동 및 주행에 쓰인다. 최고 시속은 407km/h지만, 이 속력은 메인 키만으로 도달 불가능한 속력이며, 메인 키 만으로는 낼 수 있는 속력은 350km/h에서 제한된다. 두 번째 키인 스페셜 키를 운전석 하단에 있는 키박스에 꽂으면 비로소 차체가 더욱 낮아지고, 후면의 스포일러가 작동한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힘으로 지면을 박차며 최고 시속인 407km/h에 도달하게 된다. 말 그대로 ‘봉인 해제용’의 스페셜 키인 셈이다.
글
이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