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는 해마다 수 십 종류의 신차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렇게 출시된 자동차들은 각 자동차 제조사로부터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기에 세상의 빛을 본 차들이다. 그러나 자동차 제조사의 예상과 달리 시대를 잘못 태어나거나, 특정 사건으로 인해 외면받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축복 속에서 태어났으나 세상으로부터 환영 받지 못한 자동차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하고, 왜 운명적인 결과를 맞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GM EV1,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나
GM이 만든 전기자동차 쉐보레 볼트 EV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볼트 EV 보다 앞서 대중화를 시도했던 전기자동차가 있다. 바로 1996년에 출시된 GM의 EV1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자동차가 증가함에 따라 배출가스가 급증하자, 자동차 업계 전체 판매량의 20%는 무공해 차량을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배기가스 제로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내연기관 자동차는 구조상 배기가스 배출량이 제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전기 혹은 태양열과 같은 차량을 제작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GM은 약 350만 달러를 투자하여 EV1이라는 전기자동차를 선보였다. EV1은 공기저항계수가 불과 0.19Cd밖에 되지 않았고, 0→100km/h 가속이 9초 정도로 가속성능 또한 뛰어난 자동차였다. 최고 시속은 약 140km/h이며 4~5시간 완충 시 150km정도 주행 가능했고, 추후 배터리를 개선하여 300km가량을 달릴 수 있었다. 이렇듯 높은 효율과 운동성능을 가진 EV1은 주문이 쇄도하며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GM은 채산성이 좋지 않고, EV1에 문제가 있다고 발표한 후 전량 리콜 조치를 단행했다. 그리고 리콜 된 EV1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전부 폐차 처리를 해버렸다. 그러나 납득할만한 리콜 이유를 내놓지 않아 소비자들 사이에선 자동차 업계, 석유 업계 등에서 압박했다는 루머가 나돌았고, 이 일은 영화와 노래로도 발표되었다.
BMW 2002 터보, 시대를 잘못 타고나다
얼마 전 BMW가 콘셉트카인 ‘2002 오마주’를 선보였다. 2002 오마주’의 베이스는 1973년에 출시된 2002 터보가 기반이다. 2002 터보는 BMW가 모터스포츠에서 얻은 노하우를 양산차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출시된 자동차이다. BMW는 2002 터보의 콘셉트카를 197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양산차에 터보를 탑재한 경우는 많지 않았던 시기였고, 기존 M10 2.0리터 엔진에 터보를 탑재해 최고 출력 167hp(5,800rpm), 최대 토크 24·5kg.m(4,000rpm)로, 당시로서는 뛰어난 힘을 발휘했다. 무게는 약 1,060kg에 불과해 0→100km/h까지 가속하는데 7초 초반이면 충분했던 제원은 대중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2002 터보의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의 자동차 시장 상황은 환경규제가 강화되던 시기였다. 게다가 차량이 공개되고 한달 후인 1973년 10월, 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해 1차 오일쇼크가 찾아옴에 따라 연비가 좋지 못했던 고성능 차량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결국, 2002 터보는 1974년 11월에 자취를 감췄다.
닛산 스카이라인 2000GTR, 오일쇼크에 무너진 불패의 신화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스카이라인(SKYLINE)과 GT-R. 스카이라인은 닛산의 대표적인 고성능 차량이다. 스카이라인은 닛산에 흡수·합병되기 전인 프린스 자동차 시절부터 출시되었고, 본격적으로 이름에 GT-R이 붙기 시작한 것은 1969년부터였다. 3세대 스카이라인을 기본으로 R380의 엔진을 물려받아 2.0리터의 직렬 6기통 엔진을 장착했다. 이 엔진은 최고 출력 158hp(7,000rpm), 최대 토크 18kg·m(5,600rpm)의 출력을 기반으로 5단 수동변속기와 맞물렸다. 중량이 1100kg를 조금 넘는 가벼운 차체였기에 출력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스카이라인 GT-R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의 다양한 모터스포츠에서 마쯔다에게 단 한번의 승리를 내준 것 이외에, 통산 58승 달성, 4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올리며 불패의 GT-R 서막을 올렸다. 그러나 화려한 기록을 써 내려가던 스카이라인 GT-R은 1973년 터진 오일쇼크와 배기가스 규제로 설 자리가 없어졌다. 이후 스카이라인 GT-R은 16년 동안 등장하지 못했다.
터커 토르페도, 빅3의 벽을 넘지 못하다
프레스톤 터커는 어려서부터 자동차를 좋아했고, 항상 혁신적인 자동차의 개발을 꿈꿨다. 그리고 1946년, 자동차 관련 일을 하며 모은 3만7,000달러로 자동차 제조사를 만들고, 폭격기 제조 공장을 임대하여 ‘터커 토르페도’라는 자동차 제작을 시작한다. 터커는 생산을 시작한지 100일만인 1946년, 첫 번째 자동차를 완성했다.
토르페도에는 비행기를 제작할 때 사용되었던 기술들을 응용하여 공기역학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유선형 차체를 적용했고, 안전 벨트와 디스크 브레이크 등 오늘날 쓰이는 기술들이 접목되었다. 전장은 5,560mm, 휠베이스는 3,250mm로 넓고 긴 차체를 자랑했다. 엔진 또한 혁신적이었는데, 헬리콥터 엔진을 개조하여 5.5리터 공랭식 수평대향 6기통의 엔진을 얹었다. 이 엔진은 최고 출력 166hp(3,200rpm)와 51.4kg·m(2,000rpm)의 최대 토크를 발휘했고, 최고 시속이 190km/h에 달했다.
그러나 터커는 곧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미국의 빅3(포드, 크라이슬러, GM)의 높은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이었다. 빅3는 1949년, 미국 증권 감독위원회를 통해 사기와 경제 범죄혐의로 터커를 고발했다. 게다가 회사의 요직에 있던 사람은 배신을 하고 거짓증언을 하며 터커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길고 치열한 법정공방이 오고 간 후, 터커는 혐의를 벗는데 성공하지만 이미 공장은 없어지고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결국, 터커는 51대의 터커 토르페도를 만드는데 그쳤고,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1988년, 영화 <터커>로 제작되기도 했다.
드로리언 DMC 12, 성급했던 타임머신
이 차의 이름은 몰라도 사진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어! 백 투더 퓨처.’ 바로 드로리언 DMC-12의 이야기다. 이 자동차는 GM의 부사장에도 올랐던 ‘존 재커리 드로리언‘이라는 인물로부터 만들어졌다.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던 드로리언은 GM 퇴사 후 DMC(DeLorean Motor Company)를 설립한다. 본격적으로 자신이 생각했던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디자인은 조르제토 주지아로, 설계는 로터스와 협력하여 개발을 시작한다.
1981년, 드로리언의 첫 번째 자동차가 출시되었다. 이름을 DMC-12로 명명한 이 자동차는 차량의 중심부에 두꺼운 프레임을 사용한 스틸 백본 섀시(Steel back bone)를 적용했다. 최고 출력 130hp(5,500rpm)와 21.2kg·m(2,750rpm)의 최대 토크를 발휘하는 2.8리터의 V6 엔진은 3단 자동, 혹은 5단 수동변속기와 짝을 이뤘다. 이 차의 특별한 점은 차체가 스테인리스라는 것이다. 스테인리스는 녹이 잘 생기지 않는, 고급스러운 외형을 자랑했다. 여기에 걸윙 도어를 채택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신차 개발에 많은 자금을 써버린 탓에, 자금압박으로 인해 시판을 서두르게 되었고DMC-12는 여러 테스트를 생략 해버리고 만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DMC-12는 배터리 방전, 실내 누수, 공기 제어 장치 오작동 등 여러 가지 품질문제가 대두되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오일쇼크의 여파가 남아있어 자동차 시장이 침체되어 있었고, 25,000달러라는 비싼 가격은 구매의 걸림돌이 되었다. DMC-12의 판매량은 2년 동안 8,583대에 그쳤다.
이러한 소문이 돌자 계약했던 사람들은 모두 계약금을 되찾아 버리고 판매고는 바닥을 쳤다. 이후 문제점을 보완하여 품질을 높였지만 한 번 실망한 고객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자, 회사는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창업자 드로리언은 마약 밀매에 손을 댄 혐의로 FBI에 체포되고 만다. 드로리언은 2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지만, 보석금을 위해 재산을 쏟아 부은 드로리언은 더 이상 그의 꿈이 담긴 회사를 운영할 수 없는 상태였다. 창업자 드로리언의 파산과 함께 드로리언 DMC-12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글
이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