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영국에서 강세를 보였던 것은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을 위시한 대중음악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그전까지 모터스포츠를 양분하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영국이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른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레이스에 미쳐 살았던 엔지니어이자 사업가가 있었다. 바로 콜린 채프먼이다.
안토니 콜린 브루스 채프먼(1928. 5. 19~1982. 12. 16)은 원래 대학에서 항공 기술을 익힌 엔지니어였다. 그가 유니버시티 칼리지(UCL)에 다녔던 1940년대 후반만 해도 전쟁 직후라, 자동차 엔지니어와 항공기 엔지니어는 크게 구분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런던 교외에서 호텔을 운영한 부친은 그가 엔지니어 교육을 받는 데 무리 없이 지원할 수 있었다.
그의 20대 시절 행보를 보면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주위의 의견보다는 오롯이 자신의 판단력을 동원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48년, 그는 UCL에서 마지막 학기 수학 논문의 제출을 거부해 졸업이 유예되자 영국 공군의 장교로 입대했다. 영국 공군은 그의 재능을 인정해 장기 근속을 제안하지만, 그는 복무 1년 후에 일반 시민으로 돌아왔다. 그는 공군에서의 경험과 항공 기술을 자동차에 접목하는 데 보다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부모의 부를 믿고 매사를 즉흥적으로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제조사를설립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품의 개발과 판매, 그리고 자동차 애호가들을 위한 원 오프 카피 기종 생산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가 첫 번째로 주문에 의해 개조한 자동차는 1930년대 오스틴 살룬이었다. 그가 1948년, 미니의 MK1을 개조한 자동차로 처음 레이스에 참여한 것도 이런 인연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가 MK1을 개조해 만든 첫 경주차의 이름이 ‘로터스’였다.
로터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꽃을 의미하며, 이는 후에 콜린 채프먼 본인의 레이싱팀과 제조사명으로 자리잡게 된다. 다른 제조사와 달리, 제작자의 이름이나 힘센 동물들을 상징하는 이름을 택하지 않은 것이 흥미롭다. 그는 생전 그 이유에 대해 밝히진 않았지만, 그의 아내인 헤이젤 윌리엄스의 별명인 ‘블루밍 로터스’에서 왔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둘은 결혼하기 10년 전쯤, 채프먼의 부친이 연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헤이젤 윌리엄스는 1952년, 남편 채프먼의 레이싱팀이었던 로터스가 제조사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즉 ‘창업 대주주’였던 셈이다.
레이싱 팀이자 제조사인 로터스를 설립한 후에도, 채프먼은 회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물론 그 일들은 수익과 동시에 자신의 회사에서 비전을 찾고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회사 설립 전 F1 머신들의 부품 수리 등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F1 자동차의 차체 디자인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채프먼은, 그 이전까지 다른 제조사들이 쉽게 찾을 수 없던 디자이너였다. 무엇보다도 항공 기술을 대학에서 전공하고, 공군 장교로 복무한 경험까지 있는 채프먼만큼 에어로다이내믹을 이해하는 엔지니어가 드물었던 것이다.
채프먼과 로터스가 F1의 포디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우연처럼 찾아온 필연이었다. 당시 F1 머신을 디자인하는 한편 자신의 자동차를 연구하던 채프먼은, 자신이 스태프로 있던 밴월 팀의 머신을 테스트하던 중 드라이버이자 팀 동료인 마이크 호손이 차량 파손 사고로 인해 드라이버를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가벼운 차체에 미드십 엔진을 얹은 밴월의 머신은 날카로운 조향성을 보장했으나, 강한 출력의 엔진을 프론트에 배치한 페라리나 마세라티에 비해 출력이 부족했다. 여기에 차체 강성도 약해 충격으로 인한 파손이 잦았다.
채프먼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차량의 단점을 보완한 로터스25를 만들었고, BRM으로부터 이적한 명 드라이버 짐 클락을 영입했다. 그리고 짐 클락은 이를 타고 1963년 브리티시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참고로 채프먼은 짐 클락의 친구이자 또 다른 우승 경쟁자인 존 서티스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그는 페라리와 계약했다. 운명이 바뀐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후에도 로터스가 F1을 비롯한 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는데, 그 드라이버 역시 대부분 짐 클락이었다.
그렇다면 채프먼이 로터스25에 어떤 마법을 부렸던 것일까? 채프먼은 동체의 강성이 미드십 엔진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마이크 호손의 사고로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당시 신소재이던 강화 유리섬유를 사용한 모노코크 바디를 F1 머신에 적용하기로 했다. 모노코크 차체는 이미 승용차에는 쓰이고 있었지만, F1 머신에 모노코크를 채용한 것은 채프먼이 처음이었다. 기본적으로 소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엔지니어였기에 가능한 시도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룬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후대의 자동차 컬럼니스트들에게 “드라이버의 개인적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동차 자체의 물성에 집중한 엔지니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와 로터스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디애나폴리스500(이하 ‘인디500’)을 통해 크게 알려졌다. 당시 미국의 명 레이서인 댄 거니는 로터스25를 눈여겨보았고, 콜린 채프먼에게 인디500을 위한 레이스카 제작을 의뢰했다. 채프먼은 포드와 손잡고, 모노코크 섀시를 비롯해, 로터스25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로터스29를 제작했다. 여기에 긴 거리를 달리는 인디500의 특성을 고려해 리어에 엔진을 탑재했다. 이 자동차를 탄 댄 거니는 1963년과 1964년 우승을 놓쳤지만, 1965년에 드디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로터스의 가치를 입증했다.
콜린 채프먼은 1982년 12월 16일, 만 54세의 아까운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 이후 로터스는 큰 위기를 겪는다. 로터스가 디자인을 담당했던 미국 드로리언 사가 갑작스럽게 문을 닫는 등, 이후 금융 위기에 처한다. 1983년 거의 파산 위기에 이른 로터스를 살린 것은 채프먼의 친구들이었다. 당시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의 아들 마크 대처는 채프먼의 유족들에게 영국 옥션의 설립자이기도 한 기업가 데이빗 위킨스를 소개했다. 그가 약 30퍼센트의 지분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로터스의 경영자 자리를 수락하며 로터스는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세계는 냉정한 법, 디자이너 피터 스티븐스를 고용해 새로운 디자인의 자동차를 선보이며 재기의 노력을 보였던 로터스에게 영국 투자자들은 또 다시 의문을 표했다. 아무리 친구의 친구라고는 하지만 위킨스 역시 이런 부담을 안고 갈 수는 없었고, 결국 1986년에 GM에 로터스를 매각한다. 애초에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양산 차량이 아니었던 점을 감안하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로터스는 1996년, 현재의 소유주인 글로벌 부품 제조사인 프로톤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로터스를 인수한 이들이 로터스에 깃든 채프먼의 정신과 가치를 인정하는 점이다. 이들은 영국 노퍽의 헤텔 공장을 유지하고, 세계 셀러브리티들의 패션카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마케팅에 집중해왔다. 로터스는 2016년, 한국에도 매장을 열고 스포츠카 마니아들을 유혹하고 있다.
비록 요절했고, 사후에 회사의 경영권이 넘어갔지만, 좋아하는 일 속에서 아내의 별명을 담은 회사를 운영했던 콜린 채프먼의 삶은 불행보다는 행복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리고 로터스의 이름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은 그런 에너지가 지금까지도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