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모터스포츠를 포함한 자동차 관련 전시에서 레이싱모델은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만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직종이지만, 직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많은 고민과 한 단계 발전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눈 앞에 놓여 있다. 이 콘텐츠에서는 레이싱 모델이 직업명으로 등재된 지 1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이 분야의 현주소를 조명해 본다.


레이싱걸에서 레이싱모델로, 그 의미는?

자동차 산업은 상품 개발과 마케팅 면에서 섹슈얼리티, 특히 여성의 신체적 매력과 관련된 섹슈얼리티와 밀접하게 결합해 발전해 왔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급 운송 수단을 소유해 온 이들이 권력과 경제력을 갖춘 남성이었던 점에 기인한다. 파피루스나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토기 그림 등에 등장하는 왕이나 귀족의 전차 등에, 당대의 미인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심심찮은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현대의 모터스포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레이싱모델들은 엄연히 그 직업 선택의 주체가 여성 본인들이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적 자료에 등장하는 이미지화된 여성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위상을 갖고 있다. 물론 이들의 존재를 콘텐츠로 구성하는 전시나 매체 담당자들의 인식이 다소 소모적인 면도 있으나, 이에 대한 자성과 개선 노력은 진행 중이다. 이들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가 레이싱걸에서 레이싱모델로 바뀐 것은 그 성과 중 하나다.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2016년 KSF 한국타이어 팀에서 활약한 모델 차정아

레이싱모델은 2007년 한국직업사전에 등재됐다. 사실 F1의 그리드 걸이나, 아시아에서 모터스포츠가 가장 흥성한 일본에서도 레이싱 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모두 여성성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이것이 큰 문제로 지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모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의 정착은 한국모델협회의 레이싱모델 분과(이사 이현진)가 주도했다. 이는 레이싱모델이 엄연히 상품의 홍보와 예술작품의 보조적 활동에 기여한다는 모델의 본령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또한 2000년대 초반 오윤아, 이선영 등의 모델을 필두로 시작되었던 레이싱모델 붐이 정체성 정립으로 이어지지 못하던 시기, 레이싱모델들의 직업인으로서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언어가 인식을 규정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중요한 전기였던 셈이다.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코리아 미 페스티벌의 참가자와 수상 모델들(한국모델협회 레이싱모델 분과 제공)

모델 개인을 향한 관심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현재 모터쇼나 자동차 관련 전시회에서는 자동차만큼 모델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히 고급 디지털 카메라를 비롯, 스마트 장비 보급률이 높은 국내 환경과 맞물리면서 이러한 경향을 더욱 커지고 있다. 모터스포츠의 그리드워크에서도 주목을 끄는 것은 모델들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매년 인기 있는 신예 모델들이 등장해 프로 및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손을 멈출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는 온도차가 있다. 직업명은 레이싱모델로 굳어졌지만 레이싱모델들에 대한 대우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조금 퇴보한 부분도 있다는 것이 협회와 에이전시들의 공론이다. 물론 연간 단위로 모델들과 계약하는 제조사나 모터스포츠 주관사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에도 계약 액수는 입지가 견고한 패션모델 분야나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피팅 모델, 피트니스 모델에 비해 부족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신인 레이싱모델들(한국모델협회 레이싱모델 분과 제공)

물론 여기에는 업계 관계자들이 내부적으로 진단하는 몇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우선 레이싱모델에서 레이싱에 방점을 찍었을 때, 모터스포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레이싱모델들이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견이 있다. 따라서 모델을 섭외하는 제조사나 주관사 측에서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 한 가지 원인이다.
 
전문성이 부족한 것은 지원자 수 부족과도 상관이 있다. 레이싱모델에 대한 선입견, 즉 의상의 노출 수위가 높고 단위 시간 대비 노동 강도가 높다는 인식으로 인해 선호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최근 모델 분야에서 가장 지원자가 몰리는 분야는 피트니스 모델 분야로, 이는 최근 미디어를 통해 부각되는 사례가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과거 레이싱모델 분야에서는 롤 모델이 될 만한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 직업명이 가진 정체성을 직업의 실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핸즈모터스포츠의 모델 민채윤

교육과 발상 전환, 직업 비전을 위한 해법

레이싱모델과 관련된 업무를 진행하는 곳은 앞서 언급한 한국 모델협회 레이싱모델 분과와 코리아 레이싱모델그룹, 그리고 국내 주요 모터스포츠 대회 및 팀과 모델들의 가교 역할을 하는 에이전시들이 있다. 이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레이싱모델의 직업적 정체성 확립과 비전 제시에 있어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실, 각 대학의 모델학과에 레이싱모델 전공이 설치되었던 적도 있으나 현재는 그 같은 시스템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모터스포츠를 전담하는 모델의 경우 경기 규칙과 자동차에 대한 지식 등을 익히고 경험을 쌓을 시간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교육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모델들이 모터스포츠 활동 뿐만 아니라 피팅이나 피트니스, 인지도 있는 모델들의 경우 방송이나 연예 활동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교육 시스템은 정교한 커리큘럼과 타임테이블을 갖추지 않는다면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울 수 있다.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펠라레이싱의 천세라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벽제갈비 레이싱팀의 정주희

하지만 그런 가운데 의미 있는 계획도 업계 내부에서 관찰되고 있다. 모델이라는 직업의 본질이 기업 이미지 홍보 전문가와 CS(고객만족) 교육과 닿아 있다는 점에 중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넓은 범위에서 자동차 산업 분야 전시의 컴패니언 모델을 포함하는 레이싱 모델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업 분야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모터스포츠나 전시장에서 이들의 역할은 그대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잠재적 고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한국모델협회 레이싱 분과 이현진 이사

CS 역시 이미지가 중요한 직무분야라는 점을 고려하면 모델 업무의 본질에 대한 다른 관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이러한 직군의 개발은, 특성상 현역 활동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 레이싱모델이 직업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방향이기도 하다. 과거 레이싱모델들의 경우, 이 활동을 연예로 가는 가교로 보았다가 퇴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는 현역 수명이 짧은 분야에서 다시 더 짧은 분야로 옮겨가는 방향으로의 이동으로, 롱런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던 셈이다. 이에 비해 이미지 메이킹이나 CS 분야는 체력적으로 현역 활동을 하기 어려운 30대 후반에서 40대에 접어드는 모델들이 종사할 수 있는 좋은 영역이기도 하다.


레이싱모델, 매혹 속에 감춰진 과제와 가능성
세마 쇼에서 제품 홍보 역할로도 활동한 핸즈코퍼레이션 소속 모델들(핸즈코퍼레이션 제공)

최근 레이싱모델들은 개인 SNS 채널 등을 활용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고 자신만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하기도 한다. 그 중, 상당수가 자신들이 가진 가능성만큼, 자신들을 인식하는 시선과 직업적 수명에 대한 고민을 직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레이싱모델협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와 기업들이 좀 더 발전적인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개인 단위의 고민들이 나름의 데이터로 축적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6년의 한국은 다사다난했다. 가장 첨예한 논란 중 한 가지는 젠더 인식의 올바름에 관한 문제였다. 이는 연예 및 이미지 산업 전반으로도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레이싱모델 업계의 내부 관계자들이 진행하고 있는 고민들이 보다 정교하게 진행된다면, 레이싱모델이라는 직업은 자동차산업과 모터스포츠에서 객체인 이 아니라, 주체적인 조력자로서의 성격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근간으로 하는 이 직업군에 대한 오해를 막을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기대와 과제가 모두 무거운 셈이다.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