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특성을 정의하는 여러 용어 중, 호모 루덴스라는 단어가 있다. 유희의 인간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화가 유희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시각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 특히 고성능 디비전들은 실상 재미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회사의 주주와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기술 발전을 위한 가장 확실한 장치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자동차에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나쁜가? 무겐은 이와 같은 질문에 머뭇거릴 법한 모범생 타입의 혼다 자동차에 과감한 에너지를 불어넣는 독특한 정체성의 튜너로 그 존재감을 형성해왔다.
무겐(MUGEN, 無限)은 AMG나 M과 같은 다른 제조사의 고성능 디비전과는 달리 혼다의 본진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창립자인 혼다 히로토시가 혼다 왕국의 설립자인 혼다 소이치로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심지어 그는 포르쉐나 피에히 가문의 자제들처럼 혼다에서 일한 이력도 없다. 애초에 그는 ‘마이웨이’를 걸었던 셈이다. 그나마 무겐이라는 이름은 혼다와 상징적으로 이어져 있을 뿐, 법인명은 이미 지난 2003년 엠텍(M-Tech)으로 바뀌었다.
사실 혼다 히로토시의 마이웨이 전략은 선택이라기보다는 필연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창업주인 혼다 소이치로는 평소 자신의 사업에서 가장 실패한 부분으로, 기업명을 ‘혼다’로 한 것을 꼽았다. 이는 그만큼 가족 경영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왜 아들을 입사시켜 경영 수업을 쌓도록 하지 않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소이치로가 “그렇다면 수많은 다른 아들들은 누구를 믿고 일하겠나”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영주와 무사의 신뢰관계를 닮은 일본 사회의 조직 문화, 그리고 그 자신도 한 명의 장인이고자 했던 혼다 소이치로의 직업관 등을 고려하면 특별한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겐의 훗날 행보를 보면, 그 당시 히로토시의 태도는 전략적인 것이었다. 히로토시는1942년생이었다. 아무리 부친이 가족을 경영에서 배제한다고는 했지만,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이상, 일본 경제의 초고속 성장을 기반으로 왕국의 위치에 오른 혼다가 보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갔다.
다행히 소이치로의 이러한 가족 참여 배제 전략은 히로토시의 적성에 맞았다. 아버지의 고집스런 장인적 기질을 닮은 히로토시는, 니혼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며 모터스포츠에 빠졌다.그는 학부를 졸업하기도 전에 스스로 레이싱카를 제작하는 등 자신만의 적성을 찾아갔다. 그는 당시의 혼다가 갖고 있지 못했던 모터스포츠 기반의 강력한 엔진을 자신의 길로 삼았다. 이른바 혼다의 한계를 넘어선 ‘무한(無限)’의 영역을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히로토시가 뛰어난 재능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당시의 그는 냉정히 보면 경험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이 때 그를 도운 인물이 바로 키무라 마사오였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한 히로토시는 마사오와 평생의 사업 동반자로서 인연을 시작했다. 이미 그 당시 마사오는 50차례의 혼다포뮬러카 레이스 대회에서 우승한 베테랑이자, 혼다 모터스포츠 연구원이기도 했다.그의 이력을 살펴볼 때, 마사오는 히로토시와 혼다 사이에서, 초창기에 중요한 가교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무겐은 공식적으로 1973년부터 기업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는 혼다의 시빅 1세대가 미국 출시를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히로토시는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먼저 미국 시장용의 고성능 모터사이클 파츠를 생산 및 수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사실 이 시기는 혼다 역시도 미국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조금씩 타진해가던 시기였으므로 무겐으로서는 무리한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무겐이 본격적으로 모터스포츠용 자동차로 주목받은 시기는 1986년이었다. 통상 선수들이 F1으로 진출하기 전 단계인 F3000에무겐은 자사의 MF308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엔진은 대회 규격에 따라 3.0리터(2,997cc) 8기통의 규격을 가진 자연흡기 엔진이었다. 최고 출력은 453hp(8,500rpm), 최대 토크는 37kg∙m(7,500rpm)를 발휘한 이 엔진은, 1987년 영국의 모터스포츠 영웅 나이젤 만셀의 우승과 함께 퍼포먼스와 내구성 모두를 인정받으며 세계 모터스포츠계에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1988년에는 F3머신용의170hp대 2.0리터급 MF204 엔진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1989년에는 드디어 F1에 3.5리터 V10기통 엔진을 공급하는 등 모터스포츠 엔진 제조사로서 무겐의 명성은 더욱 높아갔다.
모터스포츠 팀이자 제조사로서의 무겐은,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기간에도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다. 1992년 영국의 풋워크와 팀을 이뤄 풋워크-무겐 혼다로 F1에 참여하게 됐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다. 참고로 풋워크 팀은 일본과 인연이 많은데, <오토스포츠>지가 2013년에 선정한 ‘지난 20년간 최악의 F1’ 드라이버로 선정되기도 했던 타키 이노우에가 풋워크에서 활동한 바 있다.
사실 무겐의 F1 통산 전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F1은 단기적인 성적을 목표로 했다기보다,첨단 기술의 각축장인 F1에서 자사의 엔진이 가진 경쟁력이 어느 정도이며, 과제는 무엇인지 확인해보는 계기였다. 현재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에 기반한 독보적 성능과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혼다의 NSX 2세대도,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는 F1에 꾸준히 투자한 결과 태어난 NSX 1세대의 후예다.
물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모터스포츠 분야도 있었다. 강력한 엔진 성능을 기반으로 슈퍼 GT 클래스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으며 시빅의 튜닝카를 활용한 유럽의 투어링카 레이스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충분한 내수시장을 가진 자국의 투어링카 레이스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F1에서도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1996년 올리비에 파니스가 모나코 GP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이래, 영국의 드라이버 데이먼 힐이 1998년 벨기에 GP 우승을 차지하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주목할 만한 결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1999년에는 하인츠 헤랄트 프렌첸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GP에서 무겐의 엔진을 장착한 머신으로 우승한 바 있다. F1에서 2000년에 철수했으니, 유종의 미를 거둔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는 이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조건이 하나 있었다.바로 1991년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의 별세 후, 히로토시 본인이 최대주주가 된 것이다.가족은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소이치로의 철학이었지만,이것이 대주주가 된다는 것까지 막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90년대에 무겐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히로토시의 신분 변화와 그가 얻을 수 있게 된 데이터의 양이 달라진 것도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도 여전히 모터스포츠를 사업 역량의 핵심에 두고 있는 것은 맞지만, 무겐은 2003년부터 모터스포츠 사업 규모를 축소했다. 법인명도 M텍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소 시끄러운 일이 발생한다. 무겐이 자사의 2001년 소득 68억 엔을 MG부동산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통해 숨기고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2006년 추징금을 선고받은 것이다. 2003년부터 시작된 이 싸움에서,결국 혼다 히로토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무겐은 사이타마 지방법원으로부터 2억 4,000만 엔의 추징금을 납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혼다 히로토시가 혼다와 무겐을 두고 진행한 고민 및 당시 시장 상황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컸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글로벌 제조사들은 F1 등 레이스에 적용된 첨단 기술들을 양산차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무겐은 모터스포츠로 얻은 테크놀로지를 튜닝 파츠에 적용하는 것으로 모터스포츠의 실질적 효용성을 제고하고자 했다. 모터스포츠에 필요한 비용은 튜닝 파츠의 판매를 통해 충당할 수 있도록 하는 체질 개선도 진행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본다면 이 과정에서 무겐의 자금 정리 프로세스가 의도치 않게 ‘꼬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찌 되었든 히로토시는 무겐의 수익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1~2년 사이 일본이 기나긴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는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2000년대 중반은 일본이 그 불황의 터널 한가운데 갇혀 있었다. 특히 이 시기부터는 구매력 있던 단카이 세대(일본의 2차대전 패전 후 출생 세대로, 일본 고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의 은퇴가 진행되고 청년 실업률이 동시에 높아지면서, 완성차를 구매할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튜닝은 축소된 완성차 내수 시장의 대안이기도 했다. 이렇게 위축된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뻔한 상품 대신 ‘펀’한 상품이 필요했다.
다행히 무겐은 그 출발 시기부터 기존 완성차를 튜닝해 새로운 차로 만드는 컴플리트카(complete car) 사업 분야의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닛산의 니스모, 토요타의 TRD 등이 있으나, 무겐은 이들과 달리 철저히 분리된 자본 관계로 인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데 있어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특히 내수용으로 판매하지 않는 혼다의 차량들을 튜닝한 버전은 마니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세계 자동차 매체의 특집을 장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시빅 타입 R의 3도어 기종, N박스의 튜닝 기종 등이다.
또한 무겐은 매년 자사 튜닝 파츠의 우수성과 상품적 다변화를 알리는 차원에서 다양한 콘셉트카를 선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콘셉트카 역시 혼다의 대중적인 자동차를 기반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효율성과 경제성을 두루 갖추어 국내에서도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경형 스포츠카인 S660은 콘셉트카의 단골 베이스다. 무겐은 매년 초 열리는 아시아권 최대의 튜닝 쇼인 도쿄오토살롱에 콘셉트카를 공개하고 있는데, 2017년에는 S660을 기반으로 한 ‘가루(Garu)’가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현재 일본은 젊은이 1명당 일자리가 1.5개에 육박한다. 노동력이 모자라 사람을 모셔야 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만큼 젊은이들의 경제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닌데다, 장기 불황에 단련되며 더 나아질 내일에 대한 기대와 물질적 욕심을 버린 ‘사토리(득도)’ 세대의 등장으로 인해 소비 시장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도쿄모터쇼가 규모나 흥행 면에서 갈수록 쪼그라드는 것도 그러한 영향이 크다. 하지만 튜닝 시장의 온도는 약간 다르다. 튜닝은 어찌 보면 완성차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모터스포츠 및 고성능의 열정인 셈이다. 무겐은 아직 자동차 소비 시장에 남아 있는 이 열정의 불씨를 지속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새로 활력을 찾게 될 완성차 시장에서 무겐의 입지는 이전에 알고 있던 것 이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혼다 히로토시는 올해 어느 새 75세의 고령이지만 그의 계획은 여전히 젊다.
글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