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의 애마들

플레이보이의 창업주이자 발행인이었던 휴 헤프너가 지난 927,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플레이보이> 지 및 수많은 이벤트와 콘텐츠를 통해 그 천국을 나누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꿈과 낭만을 섹시하게 정의했고, 그 정의에 대한 정확한 부연 설명 중 하나가 아름다운 여성과 자동차였다. 특별히 그가 자동차에 집착한 것은 아니지만, 생전 그가 소유했거나 플레이보이 지의 역사상 큰 의미를 갖는 자동차들을 중심으로, 그가 20세기 이후 세계 대중문화에 남긴 메시지를 살펴본다.

자동차도 속이 훤히 보여야 한다? 컨버터블 성애자

휴 헤프너는 원래 에스콰이어 지의 기자였지만, 그의 기준에서 다소 급여 인상폭을 이유로 퇴사했다. 그리고 그는 은행으로부터 600달러, 45명 정도의 투자자들로부터 8,000달러의 투자금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그 중 1,000달러는 사업이 아니라 아들을 믿었다는 모친의 돈이었다. 그는 투자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 자본을 기반으로 창간한 <플레이보이>의 첫 호는 마릴린 먼로의 비공개 누드를 실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단숨에 인기 잡지의 반열에 올랐다. 휴 헤프너는 그 전에도 이미 뉴욕 사교계에서 잘 알려져 있던 인기남이었으나, 플레이보이의 성공적 창간을 계기로 확실히 존재감을 굳혔다.


영원한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의 애마들
플레이보이는 마릴린 먼로의 비공개 누드로 창간호부터 대박을 냈다(사진은 내용과 무관)

그의 존재감 확대에는, 마릴린 먼로의 누드 사진 외에 뉴욕 시내를 가로지르는 그의 컨버터블 자동차들도 크게 공헌했다. 이 차량들은 1950년대 미국의 경제∙문화적 풍요를 상징하는 캐딜락의 62시리즈 컨버터블과 메르세데스 벤츠의 300SL 컨버터블이었다. 사실 1950년대, 세계 자동차 제조사들의 컨버터블 유행은 경제 호황을 누리고 있던 미국 신흥 부자들의 수요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는 당시 플레이보이 지 및 플레이보이 클럽과 관련된 각종 TV 광고에 이 자동차들을 타고 등장했다. 플레이보이는 청교도적인 금욕주의 성향이 지배하던 이전까지 미국 사회의 위선에 과감히 도전한 매체였다. 헤프너처럼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업가들 중 어린 시절을 청교도적 환경에 보낸 이들은, 헤프너와 같은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고 싶어했다. 플레이보이의 자유로운 성적 표현과 컨버터블의 가치는 그런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뉴욕타임즈의 휴 헤프너 일대기. 1950년대 TV광고 속에서 컨버터블 자동차를 탄 모습으로 등장한다.

먼저 캐딜락 62 시리즈 컨버터블은 전후 미국 경제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기종이라 할 수 있었다. 전장 5,636, 휠베이스가 3,277㎜에 달하는 이 자동차는 6.0리터와 5.4리터 2종류의 가솔린 V8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 중 대표 기종인 6.0리터(5,972cc)305hp(4,700rpm)의 최고 출력에 55.3kgm(3,200rpm)의 최대 토크를 발휘했다. 그러나 이 자동차의 매력포인트는 동력 성능보다 승차 공간에 있었다. 컨버터블이지만 앞뒤 4명이 타도 넉넉한 공간감은 물론, 강렬한 레드 컬러와 화이트 스트라이프의 조화가 감각적인 인상을 구현했다. 그는 여기에 섹시한 플레이메이트(플레이보이 지의 컴패니언 모델들)들을 태우고 화려한 연회장으로 향했을 터였다.

비슷한 시기, 그가 소유했던 메르세데스 벤츠의 300SL 컨버터블은 캐딜락 62시리즈 컨버터블 보다는 슬림한 사이즈였다. 레이싱의 혈통을 갖고 있는 기종이었던만큼 전장과 휠베이스도 각각 4,520㎜과 2,400㎜로 콤팩트했으며, 체중도 현재의 경량급 로드스터 수준인 1,310kg에 불과했다. 여기에 직렬 6기통의 3.0리터(2,996cc) 엔진을 장착했다. 이 엔진은 기품 있는 구동음과 함께 215hp(5,800rpm)의 최고 출력과 27.9kgm(4,600rpm)의 최대 토크를 발휘했다. 4단 변속기를 결합해 파워트레인을 구성한 이 자동차는, 가벼운 무게를 바탕으로 0100km/h 가속 시간이 8.8초에 불과했으며 최고 속력은 260km/h까지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자동차의 키워드 역시 동력 성능보다, 은빛의 차체, 라디에이터 그릴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삼각별 엠블럼 등 이 자동차만의 스타일이었다. 캐딜락 62 컨버터블과는 달리, 이 자동차는 그 순간에 의미 있는 단 한 명의 연인을 태우기에 적합한 자동차였다.

달리는 호텔, 헤프너의 리무진

조선왕조실록 중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 11, 거사(擧舍)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들다, 움직이다는 의미이고 사()는 집을 의미했다. 영화 <간신>을 봤다면 이해가 쉬울 것인데, 이동식 숙박업소 정도라 할 수 있겠다. 휴 헤프너가 리무진을 연산군과 같은 용도로 썼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에게도 호텔 부럽지 않은 리무진이 있었다. 바로 1969년식 메르세데스 벤츠의 풀만 가드 차량이었다.
 
이 자동차는 1960년대 초중반에 생산되었던 대형 세단인 메르세데스 벤츠의 W100의 리무진을 기반으로 제작된 기종이다. 6.3리터(6,332cc) V8 가솔린 엔진은, 최고 출력이 250hp로 다소 낮았지만 51kgm의 최대 토크를 발휘했다. 3 6도어의 리무진에 풀만의 방탄 장갑과 유리를 적용하면 공차중량이 2,710kg에 달했다. 여기에 6명의 플레이메이트와 헤프너, 그리고 운전사가 함께 탄다면 족히 3,000kg이 넘었을 것이므로, 강한 최대 토크는 필수적이었다.

섹슈얼리티를 통해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은 성자가 총격을 걱정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지만, 1960년대 그의 부는 이미 엄청난 수준에 이르렀다. 2016, 플레이보이의 기업 가치는 잡지 산업 전반이 몰락해가고 있는 와중에도 5억 달러 수준으로 평가되었는데, 밑천 196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주목과 동시에 많은 이들의 시기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1960년대 말, 40대 초반에 접어든 그는 최고경영자로서의 자신의 안위가 기업과 매체의 존립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헤프너가 좌석만 6~8개에 이르는 자동차 안에서 매체의 편집기획안과 행사 운영안 따위만 고민하고 있었을 리는 없다.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당시 그는 일반 자동차에서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럭셔리 편의사양을 메르세데스 벤츠 측에 주문했다고 한다. 이곳이 작은 플레이보이맨션, 헤프너만의 거사가 되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헤프너는 조수석에 탔다? 심플한 쿠페들

지금은 다소 그 위상이 덜하지만, 플레이보이의 플레이메이트로 선정된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인기와 부를 거머쥘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에 잡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최고의 플레이메이트에게는 특별한 자동차가 수여되기도 했다. 그러나 플레이메이트는 단지 아름다운 얼굴과 섹시한 몸매만 지녀서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었다. 당대 대중문화에 대한 감각과, 패션 등에 대한 미적 식견이 있어야 했다. 자동차에 대한 감각 역시 빠질 수 없었다.


영원한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의 애마들
매월 선정되는 플레이보이메이트 중, 사진에 플레이보이의 심벌인 ‘버니’ 마크가 붙어 있는모델이 ‘올해의 플레이메이트’이다

헤프너가 플레이메이트들에게 선물한 자동차 중 최고로 꼽히는 기종은, 1971년식 핑크 컬러의 드 토마소 판테라다. 1972년 플레이메이트로 선정된 금발의 미녀, 린다 린더랜드에게 수여된 이 자동차는 거장 마르첼로 간디니의 작품이다. 언뜻 간디니의 또 다른 걸작인 미우라를 연상시키는 심플한 직선이 돋보이는 쿠페인 이 자동차는, 4,014㎜의 전장, 2,499㎜의 휠베이스로 스포티한 매력을 발휘했다. 엔진은 330hp의 최고 출력을 발휘하는 클리블랜드 사의 5.8리터(5,752cc) 엔진을 장착했으며 5단 수동변속기를 결합해 파워트레인을 이루었다.


영원한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의 애마들
드토마소 판테라와 함께 한 1972년 플레이메이트, 린다 린더랜드

이보다 앞선 1969, 청순한 이미지와 금발, 그리고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헤프너를 사로잡은 코니 크레스키에게 수여된 1969년식 쉘비 GT500 428 코브라 젯 V8 쿠페도 최고의 플레이메이트 카 중 하나로 꼽힌다. 428 428큐빅인치, 7.0리터 엔진을 뜻한다. 차체는 콤팩트한 쿠페였지만 머슬카를 방불케 하는 우람한 엔진을 탑재한 차량인 셈이었다. 이 자동차는 당시 360hp의 최고 출력을 자랑했다. 초보자가 제어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니, 헤프너가 직접 옆자리에서 교습에 나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코니 크레스키는 49세의 이른 나이이던 1995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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쉘비 GT500 428 코브라 젯 V8과 1969년 플레이메이트 코니 크레스키

헤프너의 여성 편력은 차라리 역사에 가깝다. 그것이 그 자체임을 알고 결혼했겠지만, 배우자들도 한 사람의 여성인 이상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중 헤프너를 못마땅하게 여긴 전 부인 중 한 명이 그가 아끼던 BMW의 쿠페를 서킷에서 마음껏 혹사했다는 루머도 있다. 그 루머의 주인공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생산된 BMW의 뉴6 시리즈 중 3.0CS이다. 레이싱 혈통을 지닌 차량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헤프너에게 CS는 특별했다. 이 자동차는 르망을 비롯한 여러 내구레이스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던 까닭이다. 3.0리터(2,985cc) 엔진의 최고 출력은 178hp로 강력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4,700㎜의 전장과, 2,692㎜의 휠베이스, 그리고 1,500kg에 채 미치지 않는 가벼운 공차중량으로 스포티한 주행감각을 자랑한 기종이다. 헤프너의 아내가 이 차를 서킷에 올렸는지는 미스터리이지만, 적어도 서킷에서 그 매력을 발산한 자동차임은 분명하다.


영원한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의 애마들
BMW 뉴6 3.0CS

멋진 자동차와 아름다운 여성은 인류 역사상 오랫동안 남성의 사회적 권력과 연관되어 다양한 콘텐츠 속에 나타났다. 물론 이를 인간의 대상화, 상품화로 보고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으며 그 역시 타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시대마다의 맥락을 생각해본다면 아름다운 여성과 자동차의 결합은 인간의 자연스런 본능에 대한 예찬으로 사회에 긍정적 에너지를 불어넣기도 했다. 특히 청교도적인 문화의 입김이 강했던 1950년대 미국에서, 플레이메이트의 섹시한 미소와 함께한 자동차는 사회를 변화시킨 중요한 힘이었다. 휴 헤프너는 자동차와 여성, 그리고 책과 여러 미디어를 하나의 맥락으로 묶어, 그런 의미를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