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자동차 제조사를 생각하면 흔히들 메르세데스 벤츠, BMW, 현대, 기아 등 많이 알려져 있고 도로에서도 자주 보이는 제조사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자동차 역사의 초기에는 이들보다 훨씬 유명하고 잘 나가던 제조사들이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역사책이나 찾아야 할 정도로 잊혀진 자동차 제조사를 알아보려 한다.
우아한 클래식카의 대명사 들라이예
1960년대 이전에 나온 차량들을 클래식카라고 부른다.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으로 무장한 들라이예(Delahaye)도 그러했다. 들라이예는 1894년부터 자동차를 제작하기 시작해서 1955년에 사라진 호화 브랜드다. 사실 클래식카 전문가들 사이에서 들라이예는 부르는게 값일 정도인 예술작품이나 다름없다.
프랑스를 대표하던 고급 자동차 제조사 들라이예는 경주용 자동차로 유명했다. 사실 들라이예는 태생부터 경주용 자동차 제조사였다. 들라이예의 창립자 에밀 들라이예는 1894년 본인이 직접 설계한 단기통 엔진을 얹은 자동차를 제작했다. 그리고 1896년에는 그 자동차를 타고 9월부터 10월까지 총 1,710km를 달리는 파리–마르세유 내구 레이스에 참가해 10위 이내로 완주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후 이름을 들라이예 자동차로 바꾸고 경주용 차량과 럭셔리 차량에서부터 트럭과 소방차까지 다양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5년에는 들라지를 인수했고 1938년에는 르망 24에서 우승까지 하며 명품 자동차 제조사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군의 공습으로 들라이예는 큰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불황으로 들라이예의 주력인 럭셔리 차량이 팔리지 않아 결국 1954년 호치키스에 합병되었으나 호치키스가 몰락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 대표 V12 경주차 제조사, 들라지
들라지(Delage)는 앞서 언급한 들라이예가 인수한 자동차 회사로 유럽 최초로 V12 엔진을 사용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들라이예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전문가가 아니라면 잘 모르는 클래식 브랜드다. 들라지의 창업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사 푸조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자동차산업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해 1905년 자신의 이름을 단 자동차 제조사를 세웠다.
들라지는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자동차 경주에 참가해 우승을 하며 이름을 알렸고 1차 세계 대전 때 자동차 외에도 군수품 생산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유럽 최초로 V12엔진을 제작해 그랑프리에서 제조사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경주용 차량에만 투자해 도산하기 일보직전까지 갔고 결국 1934년 들라지는 모든 상표권과 기술에 대한 권리를 들라이예에 넘겼다. 다행히 들라지를 높게 평가한 들라이예의 경영진은 들라지와 들라이예 두개의 브랜드를 같이 운영했다. 하지만 1954년 호치키스가 들라이예를 인수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전체가 없어 지면서 시대를 풍미했던 들라지도 같이 사라졌다.
부가티 보다 더 비쌌던 부아쟁
부아쟁(Voisin)은 비행기 제조사에서 시작됐다. 1905년 부아쟁 형제는 20m 높이로 600m를 날아가며 유럽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보다 2년 앞선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다. 부아쟁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1973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최초로 비행기를 발명했다고 주장했다.
부아쟁은 1차 세계 대전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자동차 제조사로 전향했다. 비록 비행기를 최초로 개발하지는 못했어도 라이트 형제가 하지 못한 자동차를 제작한 것이다. 부아쟁의 자동차는 알루미늄 차체로 만들어 가볍고 연비까지 좋아 인기를 모았다. 1931년에는 V12 엔진을 탑재하고 비행기 설계 기술을 적용한 유선형의 차체를 적용한 초호화 자동차 C20을 제작했다. C20은 왕족, 귀족, 부유층을 타겟으로 했으나 너무 비싼 가격 탓에 많이 팔리지 못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이후 귀족층이 몰락하면서 주력 고객이 사라진 점도 타격이었다.
그럼에도 부아쟁은 오히려 더욱 고급차를 만들어 더 비싼 가격에 팔겠다는 전략으로 당시 신기술인 모노코크 섀시와 독립식 서스펜션을 갖춘 C28을 만들었다. C28은 현대 가장 비싼 자동차 타이틀을 가진 부가티 타입 57 보다 출시 가격이 더 비쌌고 결국 60여대만 팔리며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부아쟁 자동차들은 몇 대 남아 있지 않아 희소성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보물로 여겨지고 있다.
세계 최초로 V12 엔진을 사용한 패커드
현재 미국 럭셔리 브랜드는 캐딜락과 링컨이지만 과거에는 패커드(Packard)와 듀센버그(Duesenberg)가 있었다. 그 중 패커드는 ‘세계 최초로 V12 엔진을 사용한 제조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아메리칸 럭셔리의 상징과도 같은 제조사였다.
1880년대 이후로 유럽에서 자동차 제조업이 떠오르고 있었고 윌리엄 패커드, 제임스 패커드 형제는 이러한 트렌드를 알아차리고 1899년 자동차를 설립, 첫번째 자동차를 생산했다. 이후 패커드에서 만든 자동차에 만족한 헨리 조이가 투자하며 1902년 패커드 자동차로 이름을 바꾸고 회사도 디트로이트로 옮겼다. 패커드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자동차 역사상 최초로 V12엔진을 얹은 트윈 식스를 출시 하면서부터다. 그러나 당시 포드 모델 T의 가격이 440달러였고 패커드 자동차는 2,600달러부터 시작하는 매우 비싼 자동차였다.
1921년에는 29대 미국 대통령 워렌 하딩이 패커드에서 만든 자동차를 타고 백악관에 입성하며 대통령이 타는 자동차라는 명성까지 더해졌다. 그러나 1929년 경제대공황으로 인해 경영이 어려워졌고 패커드는 고급차 정책을 포기하고 중산층을 타깃으로한 차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장에는 대량 생산을 무기로 내세운 포드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결국 각고의 노력에도 1954년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 스튜드베이커에 합병되었고 결국 1959년 자동차 생산 중단 조치가 내려지며 패커드도 완전히 문을 닫았다,
위대한 사람의 자동차, 듀센버그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주인공이 타는 노란색 클래식카가 눈에 들어온다. 이 자동차가 바로 듀센버그(Duesenberg)다. 이름부터 독일 느낌이 나는 이 차는 현재 진짜 독일 고급차 벤츠나 BMW 보다 더 비싸게 판매되고 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듀센버그 형재는 1899년 가솔린 엔진을 만들어냈고 이 기술로 메이슨 자동차 회사를 설립해 힐클라임 경기 등에 참가하며 인지도를 높여나갔다. 그 후 1913년 메이슨 자동차 회사를 매각하고 새롭게 듀센버그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듀센버그는 경주용 차량 제작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4륜 유압식 브레이크를 적용한 모델 A를 선보였고 당시 판매되던 동급 고급 차량들에 비해 1,000달러 이상 더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하지만 1922년 듀센버그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 결국 파산했다. 그때 마침 새로운 투자자의 등장으로 다시 부활했고 듀센버그는 이전 보다 더욱 고급스럽고 강력한 차량들을 생산하며 부호들과 왕족 등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것도 잠시 1937년 지나친 사업확장으로 결국 모기업이 도산했고 듀센버그도 재기하려고 애썼으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결국 재기에 실패했다.
최초의 미국 대통령 차, 피어스 애로우
트럼프나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각 대통령의 의전차량이 무엇이 될 것인가가 주목을 받는다. 최근에는 캐딜락이 공식 미국 대통령 의전차로 활동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1909년 2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윌리엄 태프트는 당시 수많은 미국 자동차 제조사들 중 피어스 애로우(Pierce-Arrow)를 선택했다. 즉, 피어스 애로우는 미국 대통령의 첫번째 공식 의전차를 만든 자동차 제조사였다. 참고로 윌리엄 태프트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용인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피어스 애로우를 설립한 조지 피어스는 뉴욕에서 새장, 아이스박스, 욕조 등 생활 용품을 판매해 큰돈을 벌었고 1901년 프랑스의 드디옹에서 만든 엔진과 변속기를 탑재한 자동차를 만들며 본격적으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1904년 회사명을 피어스 애로우로 바꾸고 상류층들에게 인기 있는 자동차를 제작했다. 이 후 백악관 최초의 공식 자동차로 지정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명문가는 3P(피어스 애로우, 패커드, 피어리스) 자동차를 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피어스 애로우는 고급차 브렌드 이미지를 구축해갔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1차 세계 대전 이후 럭셔리 자동차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면서 피어스 애로우도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1928년 스튜드베이커와 합병했고 1년뒤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모회사인 스튜드베이커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피어스 애로우는 비싼 가격 탓에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며 1938년 문을 닫았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잊혀진 클래식카 제조사들이 존재했다. 만약 이런 제조사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의 캐딜락이나 링컨, 부가티, 푸조 등의 위치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년 미국, 이탈리아 등에서 콩쿠르 델리강스나 콘코르소 델레간차와 같은 여러 클래식카 전시회에서는 사라진 제조사의 자동차들이 빛을 발한다. 이러한 자동차들은 웬만한 빌딩 한 채 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사라진 자동차 제조사들의 차는 그 희소성 때문에 더 높은 가격이 붙게 디고, 억만장자 자동차 수집가들은 이러한 희소한 차량을 통해 서로 교류하기도 한다. 현재 제조사들도 존폐가 거론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지금 도로에 다니는 제조사들도 문을 닫고 희소성이 더해져 억만장자 수집가들 사이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
정휘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