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이란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를 뜻한다. 하지만 미운정이라는 말도 있듯 경쟁하다 보면 애증의 관계가 형성된다. 물론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저마다 라이벌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백분의 일초만에 승부가 갈라지는 F1은 더욱 라이벌 관계가 돋보인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포뮬러 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들을 소개한다.
바른 생활 불사조 니키 라우다와
바람둥이 챔피언 제임스 헌트
20세기 가장 위대한 모터스포츠 라이벌이라면 단연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가 꼽힐 것이다. 그들의 경쟁 구도는 <러시 더 라이벌> 이라는 영화로 제작됐을 정도였다. 니키 라우다는 명문 재벌가 출신이지만 바닥에서 시작해 자수성가한 경우다. 가문에서 레이서가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1971년 마치 팀에서 F1에 데뷔했지만 팀은 당시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라우다가 아니라 팀 메이트인 로니 피터슨을 밀어주고 있었다.
라우다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3년 BRM으로 이적한 이후였다. 그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며 엔초 페라리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덕분에 라우다는 1974년 페라리로 이적했고 이듬해인 1975년 페라리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생애 첫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다. 그러나 1976 시즌, 뉘르부르크링에서 개최된 11차전 독일 그랑프리에서 코너 연석에 부딪혀 중심을 잃고 펜스에 충돌해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를 당했다. 동료 드라이버들과 구급대원들의 빠른 구조 활동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전신 화상에 유독가스 흡입으로 인한 폐 손상까지 입어 전문의들도 가망 없다고 볼 정도였다.
하지만 라우다는 6주만에 불사조처럼 부활해 다시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참가했다. 그냥 완주도 아니고 4위까지 기록한 역주였다. 물론 사고로 인한 공백으로 1976년 월드 챔피언은 라이벌인 제임스 헌트에게 내주었으나 우승 못지않은 성과였다.라우다는 1977년 다시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고 1978년 브라밤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1979년 그의 커리어 상 첫 번째 은퇴를 했다. 1982년 맥라렌으로 복귀, 1984년 우승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1985년 시즌 도중에 화상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저비용 항공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반면 1976년 F1 월드 챔피언을 달성한 제임스 헌트는 니키 라우다 보다 2년 늦은 1973년 헤스키스로 F1에 데뷔했다. 철저히 계산적이었던 라우다와 달리 본능적이고 마초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후 1976년 맥라렌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적하자마자 바로 월드 챔피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후 우승은 한번이면 족하다며 우승 이후 의욕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79년 올림푸스로 이적하고 레이스에 집중하지 못하며 리타이어 횟수가 잦았고 결국 데뷔 7년만에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F1 해설위원으로 활약했다. 라이벌이자 친구인 라우다에 비해 선수로서의 능력은 부족했지만 잘생긴 외모로 F1계의 플레이보이라 불리며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 심지어 ‘섹스는 챔피언의 아침식사’라는 문구를 슈트에 붙이고 다녔을 정도다. 또한 그가 활동하던 당시 일본 그랑프리에서 기록적인 폭우로 많은 선수들이 경기 진행에 대해 걱정했지만 헌트는 일본인 레이싱 걸과 관계를 가졌다는 루머가 떠돌 정도였다. 그는 은퇴와 복귀를 반복한 라우다와 달리,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박수칠 때 떠난 케이스다. 그래서 오히려 팬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천재 아일톤 세나와
교수 알랭 프로스트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시대가 끝나고 바로 이어서 아일톤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의 시대가 찾아왔다. 특히 아일톤 세나는 F1역 사상 가장 천재적이고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브라질 출신인 세나는 카트 선수에서부터 시작해 F3를 거쳐 1984년 톨맨 팀에서 F1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톨맨은 약소 팀이었고 머신의 성능도 안 좋았다. 그럼에도 알랭 프로스트와 니키 라우다, 나이젤 만셀 들을 제치며 각종 팀과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1985년, 로터스와 계약을 맺고 생애 처음 그랑프리 우승을 하며 종합 성적 4위로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1987년에는 종합 성적 3위를 달성하며 포디움에 올라섰다. 1988년 맥라렌으로 이적하고 생애 최초로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에는 고든 머레이가 제작한 맥라렌 MP4/4 머신이 사기급 이었기에 1988 시즌은 같은 팀인 세나와 프로스트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1990년과 1991년에도 우승을 하며 세 번의 월드 챔피언을 달성했다.
1994년에 이적한 윌리엄스가 그의 마지막 커리어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주 이몰라 서킷에서 진행된 3차전인 산마리노 그랑프리가 그의 마지막 레이스가 됐다. 당시 퀄리파잉에부터 롤란드 라첸베르거가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있었다. 이로 인해 경기를 중단하자는 요청과 많은 선수들이 기권을 고민했었다. 그리고 시작된 경기 6랩째 선두인 세나가 그립을 잃으며 방호벽을 그대로 충돌했고 무거운 구동축이 두부를 강타해 결국 사망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정확하지 않고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날씨는 맑았고 서킷 조건도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머신의 문제 및 먼저 발생한 사망 사고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모터스포츠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세나의 장례식은 브라질 국장으로 진행됐으며 전세계가 충격에 빠졌었다. 현역 F1선수들 중 세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선수가 찾기 힘들 정도로 세나는 전설이었다. 참고로 현재 세나의 조카인 브루노 세나가 F1과 포뮬러E에서 우수한 활약하고 있다. 또한 한때 세나가 활동 했었던 맥라렌에서는 세나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2018년 맥라렌 세나를 선보이기도 했다.
세나의 명성과 비극에 가려 상대적으로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도 4번이나 월드 챔피언을 차지했을 정도로 실력이 우수했다. 프랑스 출신의 프로스트는 항상 철저한 분석과 연구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에 ‘서킷 위의 교수’라 불렸다. 이러한 성향은 맥라렌에서 활동하던 당시 니키 라우다와 함께 지내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로스트는 1980년 맥라렌으로 F1에 데뷔, 1년 후인 1981년부터 르노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1984년 다시 맥라렌으로 돌아와서 치룬 경기에서 신입 레이서 아일톤 세나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세나와 프로스트의 라이벌 관계가 시작됐다.
1985년과 1986년에 2년 연속 월드 챔피언을 획득했다. 그러나 세나가 맥라렌으로 영입되며 팀 메이트가 되고 이후 세나와 번갈아 가며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경쟁했다. 이에 지친 프로스트는 1990년 페라리로 이적한다. 그러나 1993년 성적 부진으로 페라리에서 방출되고 윌리엄로 이적한다. 그리고 곧바로 월드 챔피언을 달성했다. 하지만 윌리엄스에서 프로스트의 반대에도 세나를 스카우트하였고 결국 프로스트는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는 아들인 니콜라 프로스트가 F1과 포뮬러 E에 활발히 활동하며 브루노 세나와 함께 대결 구도를 펼치고 있다.
황제 미하엘 슈마허와
‘플라잉 핀’ 미카 하키넨
세나의 죽음과 알랭의 은퇴로 이들의 시대도 저물고 F1역사상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선수 미하엘 슈마허와 미카 하키넨의 시대가 찾아온다. 미하엘 슈마허는 월드 챔피언만 7회를 기록했으며 총 91회 그랑프리 우승한 전설 중의 전설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천부적인 재능으로 카트계를 평정하고 F3에 출전,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1991년 조던–포드에 영입되어 F1에 데뷔했다. 그러나 이때는 아일톤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가 휘어잡고 있던 시기라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가 첫 월드 챔피언에 오른 것은 베네통으로 이적 이후인 1994년이다. 아일톤 세나의 사고와 알랭 프로스트의 은퇴가 있었던 그 해였다. 그러나 슈마허는 1995년 시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대로 만들며 운이 아님을 입증했다. 또한 그의 커리어 역시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페라리로 이적한 1996년부터 사건사고가 겹쳤다. 1996년에는 새로운 머신에 적응하느라 3위로 시즌을 마쳤고 1997년에는 다소 과한 승부욕으로 당시 선두로 달리고 있던 자크 빌뇌브를 들이 받아 버려 몰수 패 당했다. 1998년과 1999년에는 부상으로 성적이 저조했다.
2000년 시즌은 황제가 복귀했다고 부를 만했다. 그는 그 때부터 2004년까지 한번도 우승을 놓치지 않았으며 시즌 내에도 연전연승을 차지 했다. 2005년부터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며 2006년 은퇴를 선언했다. 물론 2010년 메르세데스 GP 소속으로 복귀하며 은퇴를 번복했다. 그러나 2012년 시즌까지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고 결국 다시 은퇴했다.
그러나 비극은 오히려 위험이 도사린 트랙을 떠난 이후에 찾아왔다. 은퇴 후 떠난 가족 여행에서 스키를 타던 중 바위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다행히 최근에는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F1을 시청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카 하키넨은 미하엘 슈마허가 두려워한 유일한 레이서다. 플라잉 핀으로 대표되는 핀란드 출신 레이서로 F1 데뷔는 미하엘 슈마허와 같은 1991년이며 소속 팀은 로터스였다. 그리고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맥라렌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1994년까지 세나, 프로스트에게 가려져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후 1995년부터는 항상 상위권을 유지하며 잠재된 능력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8년 생애 첫 종합우승을 기록하였고 1999년에도 월드 챔피언을 기록하며 슈마허를 독주를 막을 유일한 인물로 부상했다.
2000년 F1 시즌 13차전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F1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추월 장면을 보여주며 많은 팬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맥라렌의 머신이 빠르지만 불안정했고 때문에 2위로 포디움에 올라섰다. 2001년 시즌에서도 머신이 하키넨의 역량을 받쳐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