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1일, 토요타 GR 수프라가 공식 출시됐다. 이 차가 등장하는 영화와 만화를 보면서 자라온 이들에게 GR 수프라의 출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GR 수프라는 2019년 북미 오토쇼를 통해 최초로 공개한 5세대로, 무려 17년만에 나온 신형이다. 출시 행사에서는 토요타 코리아의 노부유키 사장과 GR 수프라 수석 개발자 타다 테츠야가 함께해 해당 차량의 제품 메시지를 전하고, 다양한 궁금증에 대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세계 젊은이들의 심장을 뛰게 한 스포츠카,
토요타 수프라
토요타 수프라는 1978년 1세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토요타의 대표 스포츠카다. 수프라는 비슷한 성능을 발휘하는 타 제조사의 스포츠카대비 저렴한 가격, 상위 브랜드의 차종들을 제치는 우수한 퍼포먼스로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특히 4세대 토요타 수프라의 경우 헐리우드 영화 <분노의 질주>에서 페라리를 이기는 장면 하나로 많은 젊은이들의 드림카로 등극했다.
그런 수프라는 한국에서도 유명했지만 그간 공식적으로 출시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21일 정식 출시는 나름대로 역사적이다. 특히 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면 토요타의 이번 결정이 다소 놀랍다. 차종 자체가 지닌 강한 개성이 출시의 당위성에 힘을 실은 사례다.
이번에 나온 GR 수프라는 ‘수프림 펀 투 드라이브(Supreme Fun-To-Drive)’를 슬로건으로 걸고 운전이 주는 최상의 즐거움을 콘셉트로 개발됐다. 특히 5세대의 수프라는 토요타의 모터스포츠 디비전인 ‘토요타 가주레이싱(GAZOO Racing)’의 약어인 GR이 붙어 있다. 참고로 ‘가주’는 이미지를 뜻하는 일본어 ‘가’(が/画)와 동물원을 뜻하는 영어 ‘주’(ZOO)의 합성어다. 가주레이싱은 ‘더 좋은 차 만들기’라는 목표를 향해 극한의 레이스를 통한 자동차의 진보를 도모하고 있으며 WRC, WEC, 뉘르부르크링, 5대륙 주파 등의 모터스포츠 종목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 특히 2019년에는 WEC(월드 내구레이스 챔피언십)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에서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그 외에 대회 일정부터 고성능차 연계까지 토요타 아키오 회장이 직접 챙기며 애정을 쏟고 있기도 하다.
박스터 사냥 ‘파티원’, BMW와의 협업
토요타 GR 수프라가 BMW와 협업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이는 지난 2011년 토요타와 BMW가 기술 제휴 맺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제휴로 토요타는 하이브리드카에 관해 개발 중인 차세대 기술을 BMW에게 공유하고 BMW는 탄소섬유를 사용한 차체를 경량화하는 기술을 토요타에게 제공했다. 또한 공동으로 차세대 리튬이온 전지의 개발도 시작했으며 양사가 가진 다양한 환경 기술을 채용한 스포츠카의 공동 개발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날 행사에서 토요타 수프라 수석 개발자 타다 테츠야는 토요타 수프라의 개발이 지난 2012년 5월부터 시작됐다고 전했다. 당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토요타 86의 유럽 미디어 시승회가 열렸다. 그때 토요타 본사에서는 테츠야 수석개발자로 하여금 비밀리에 독일 뮌헨에 위치한 BMW 본사로 가서 차세대 스포츠카 개발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했다. 현재 이 일화를 돌이켜본다면 수프라를 부활 시키려는 토요타의 의도가 녹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요타가 BMW와 접촉한 이유는 먼저 앞서 설명한 제휴 관계라는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직렬 6기통 엔진과 후륜 구동 레이아웃을 사용하는 자동차의 대표격인 제조사가 BMW였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부분은 토요타 수프라 개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수프라는 1978년 출시한 1세대부터 항상 직렬 6기통 엔진과 후륜 구동 레이아웃의 조화라는 레시피를 사용해왔다. 따라서 새로 나올 수프라 역시 그 헤리티지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로 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테츠야 수석 개발자는 BMW의 개발팀과 함께 포르쉐 박스터를 목표로 잡았다고 전했다. 직렬 6기통 엔진과 후륜 구동 레이아웃의 조합으로, 수평대향 엔진의 박스터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밤낮없이 개발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BMW Z4와 토요타 수프라라는 것이 테츠야 수석 개발자의 핵심 메시지였다. 이는 지금의 수프라를 두고 단순히 BMW의 파워트레인을 장착한 변종 정도로 치부하지 말아달라는 완곡한 당부로 들렸다. 참고로 당시 타다 테츠야와 함께 차세대 스포츠카 개발을 진행 했던 BMW 연구개발 총괄 부회장 헤르베르트 디스는 현재 폭스바겐 CEO를 맡고 있다.
닮은 듯 다르다!
극한의 코너링을 위한 GR 수프라
테츠야 수석 개발자의 말대로, 같은 플랫폼으로 개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BMW Z4와 수프라가 이란성 쌍둥이나 카피캣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BMW와 토요타가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 세부적인 부분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테츠야 수석 개발자의 메시지였다.
오히려 수프라의 경우 처음부터 연비나 주행의 안락감은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익스트림 주행 경험만을 목표로 개발됐다는 것이 토요타 측의 메시지다. 동일한 파워트레인이지만 가속과 스포티함에 초점을 맞춘 세팅, 자사의 또다른 쿠페인 86보다도 짧은 휠베이스와 넓은 전·후 윤거가 그 증거다. 또한 무게 중심이 양산차량들 중 가장 낮다는 것이 토요타 측의 전언이다. 이를 통해 포르쉐 박스터와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코너링 퍼포먼스를 발휘한다. 다소 안락한 성향의 BMW Z4와 수프라는, 그래서 닮은 듯 전혀 다른 차량이다.
17년전의 로망을 살린 GR 수프라
토요타 GR 수프라는 BMW의 3.0리터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해 최고출력 340ps, 최대토크 51kg·m를 발휘한다. 스포티한 주행에 걸맞는 강력한 힘과 가속성능을 발휘한다. 변속기는 BMW가 사용하는 ZF 8단 자동변속기다. 또한, 액티브 사운드 컨트롤(Active Sound Control)을 적용해 주행모드에 따라 강렬한 구동음과 배기음을 제공한다. 사실 이 파워트레인의 장착은 수프라의 전통 혹은 정체성과 무관하다는 이유로 마니아와 미디어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개발의 히스토리를 적극적으로 전해 나간다면 충분히 공감을 얻을 만하다.
하지만 외관 디자인은 토요타의 클래식 스포츠카 2000GT의 실루엣을 이어받아 전면이 길고 후면이 짧은 ‘롱 노즈 숏 데크(Long Nose Short Deck)’ 컨셉으로 개발되었다. 또한 외부 공기흐름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실내 탑승자의 헤드룸을 확보한 더블버블 루프(Double-bubble Roof)와 고속주행 시 다운포스를 이끌어내는 후면 디자인 그리고 볼륨감 있는 전·후면 휀더 등으로 우수한 운동성능에 걸맞는 외관 디자인을 적용했다.
GR 수프라는 스포티한 외관에 어울리지 않게 에어덕트들이 막혀있는데, 이는 추후 수프라 오너들이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제거해 공력성능이나 냉각효과를 강화할 수 있다. 우수한 튜닝 베이스였던 17년 전 수프라의 감성적 요소를 유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6개의 LED 헤드램프, 100㎜ 직경의 듀얼 머플러, 19인치 단조 알로이 휠 그리고, 후면의 GR 엠블럼으로 스포츠카다운 디테일을 차량 곳곳에 표현했다.
토요타 GR 수프라의 실내 디자인은 수평성을 강조한 인스트루먼트 패널을 적용하여 넓은 전방시야를 확보했다. 사실 이 때문에 BMW Z4와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라는 저적도 나왔다. 그러나 패들 시프트와 주행 중 다양한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1.8인치 풀 컬러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그리고 운전자와 가깝게 배치하여 시선이동을 최소화한 다양한 제어 버튼은 시대적인 요청을 반영한 것이다.
물론 몸의 흔들림을 잡아주는 하이 백(high back) 타입의 스포츠시트와 콘솔의 무릎패드, 직관적인 조작감을 전하는 스티어링 휠 등 실내 디자인은 운전자가 드라이빙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아울러 수프라는 안전한 주행을 도와주는 전방충돌 경고장치, 차선이탈 경고기능,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및 어댑티브 하이빔 시스템 등 다양한 예방안전기술이 적용되어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안전에도 크게 신경 썼다. GR 수프라의 권장소비자가격은 7,380만 원 인데, BMW Z4의 197ps짜리 20i sDrive 가 6,600~6,900만 원대, 387ps의 M40i가 9,100만 원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합리적인 가격이다.
토요타 수프라는 국적을 떠나 청소년 시절 ‘이니셜D’와 ‘분노의 질주’를 보며 수프라에 대한 로망을 키웠던 기자가 정말 갖고 싶어 했던 스포츠카다. 이 만화들과 함께 성장한 이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기존 수프라의 아이덴티티를 찾아볼 수 없는 외관 디자인과 BMW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 실내를 가진 5세대 GR 수프라가 등장했을 때 그 실망감과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그래서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실물로 만난 GR 수프라는 수석 개발자 타다 테츠야가 말했듯 BMW Z4와 완전히 달랐으며 확실히 구매욕이 생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토요타 수프라가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느낌이 전혀 없어 수프라의 후속이라는 느낌은 옅다. 하지만 만약 5세대 수프라가 아닌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한 후륜 구동 스포츠카라고 생각한다면? 수프라의 과거에 기준을 두고 떠올렸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쏙 들어갈 정도로 매력적인 스포츠카다.
한편 토요타는 2019년 8월 이후 일본 정부의 정치보복성 수출 규제 조치와 이에 반대하는 시민사회 차원의 불매운동 여파로 중단했던 마케팅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고 있다. 2019년 하반기, 불매운동 시작 이전 대비 30% 이상 하락한 판매량도 새로운 모델로 조금씩 극복해가겠다는 의지다. 토요타는 2020년 상반기 GR 수프라를 시작으로 중형 세단 캠리의 스포츠 에디션 XSE 모델과 프리우스 4륜 구동 모델 그리고 프리우스C 크로스오버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글
정휘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