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했다 하면 파산은 기본! 자동차 제조사의 ‘파괴왕’

한 인기 웹툰 작가는, 본인이 몸담았던 회사나 방문했던 곳이 전부 없어지거나 큰 사건에 휘말리면서 파괴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은 자동차 업계에서도 흔한 일이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인수해준 물주를 거덜내는 것으로 유명한 자동차 업계 유명한 파괴왕들을 소개한다.

일곱번 회사를 옮긴 람보르기니

람보르기니는 트랙터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엔초 페라리에게 무시 당한 것에 복수하기 위해서 1963년 설립한 슈퍼카 제조사다. 타도 페라리를 외치며 미우라, 에스파다 등 역사에 남을 슈퍼카들을 탄생시키며 승승장구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73년 석유 파동이 발생하면서 재정난에 시달렸다. 1974년 스위스의 부유한 실업가인 조지 핸리 로세티와 르네 라이머에게 람보르기니 지분을 각각 51%, 49%씩 매각하게 된다. 물론 그 후에도 쿤타치를 제작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계속되는 석유파동의 여파로 결국 1978년 파산한다.

다행히 1980년 사업가 형제, 패트릭 밈란과 장 글로드 밈란이 람보르기니를 인수하며 부활을 예고했지만 기업이 아닌 개인이 운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1987, 크라이슬러가 2,520만달러(한화 약 296억원)에 람보르기니를 인수한다. 크라이슬러 산하에 있는 동안 람보르기니는 포뮬러 원에도 출전하고 쿤타치의 후속인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도 출시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계속 적자만 났고 결국 1994년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사업가이자 당시 대통령의 아들이던 토미 수하르토 소유의 메가테크에게 매각하게 된다. 

메가테크는 크라이슬러로부터 약 4,000만달러(한화 약 470억원)에 람보르기니를 사들였다. 그리고 1년 뒤 1995, 람보르기니의 지분이 토미 수하르토가 운영하는 또다른 회사, 말레이시아의 기업 마이콤과 인도네시아의 회사 V파워에게 각각 40%, 60% 넘어간다. 그러나 1998년 메가테크(마이콤, V파워)가 망하면서 마침내 폭스바겐 그룹의 아우디에게 넘어가게 된다. 당시 메가테크가 아우디에게 람보르기니를 매각한 금액은 약 11,000만달러(한화 1,294억원)라고 한다. 람보르기니는 현재도 아우디의 자회사로 남아 있으면서 폭스바겐 그룹의 지원 속에 옛 전성기 시절 모습을 되찾았다.

여기 저기 팔려 다닌 복잡한 삶을 산 마세라티

마세라티는 1914년 알피에리, 빈도, 카를로, 에토레 마세라티 형제가 설립한 이탈리아의 럭셔리 슈퍼카 브랜드다. 106년의 긴 역사를 지닌 자동차 제조사인 만큼 소유자도 많이 바뀌었다 있다. 마세라티는 설립 하면서부터 다양한 모터스포츠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하며 마세라티라는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32년 마세라티의 창립 멤버이자 드라이버인 알피에리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1937년 이탈리아의 부유한 기업가 아돌포 오르시에게 경영권을 내어주게 된다. 오르시 가문에게 매각된 후 1957년부터 마세라티는 모든 모터스포츠에서 철수하고 도로용 차량 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때 나온 차량들이 3500GT와 마세라티 최초의 4도어 세단 콰트로포르테 그리고 럭셔리 그랜드 투어러 기블리다.

이처럼 양산차량 제작에 몰두한 것이 오히려 마세라티에게 독이 되었고 1968년 프랑스의 유명 자동차 제조사 시트로엥에게 인수된다. 시트로엥 산하에 있으면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기존 차량들을 살짝 개량한 그저 그런 차량들만 만들어냈다. 오히려 역으로 시트로엥은 DS21을 기반으로 마세라티와 협업해 만든 고급 쿠페 SM을 발표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1973년 석유파동이 발생하고 이 여파로 시트로엥이 도산하자 PSA는 마세라티 매각의사를 밝혔다. 이에 1975년 이탈리아 정부와 드 토마소의 도움으로 다시 이탈리아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1984년 크라이슬러가 지분의 15%를 사들이면서 마세라티를 탐내는 듯 했으나 1989년 피아트가 마세라티의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1993년 완전히 피아트 그룹에 합병된다. 이때부터 페라리와 한솥밥을 먹기 시작하며 출시되는 모든 마세라티 차량에 페라리의 파워트레인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9년 돌연 피아트가 마세라티의 모든 지분을 페라리에게 넘겨주며 페라리가 마세라티의 새주인이 된다. 그러나 2005년 페라리가 다시 피아트 그룹에 마세라티를 반환하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007보다 화려한 과거를 지닌 애스턴마틴

애스턴마틴은 1913년 설립된 영국의 럭셔리 스포츠카 제조사로 설립 초기에는 차량 개조 및 정비를 전문으로 했다. 1914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애스턴마틴은 다른 소규모 정비업체들과 함께 비행기 제조 및 정비업체로 합병됐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20년 다시 애스턴마틴을 설립하고 브랜드를 살리기 위해 각종 모터스포츠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첫 파산은 1924년으로 1차 세계대전 후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1932년 갑부들로 구성된 애스턴마틴 동호회가 다시 일으켜 세웠고 1947년 데이비드 브라운이 애스턴마틴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DB 시리즈라는 명칭은 애스턴마틴을 성공적으로 부활시킨 데이비드 브라운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나 이 데이비드 브라운도 1972년 석유파동 때문에 다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됐다. 결국 데이비드 브라운은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윌슨에게 약 645만달러(한화 77억원)에 매각한다. 그럼에도 애스턴마틴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1974년 두 번째 파산을 맞게 된다.

1975년 미국의 반도체회사 내셔널 세미컨덕터의 회장 피터 스프래그와 토론토의 호텔 경영자 조지 민덴이 135만달러(한화 16억원)에 애스턴마틴을 인수한다. 여기에 1980년에는 애스턴마틴을 좋아하는 부호 알렌 커티스가 투자하며 도움을 주었으나 1981년 석유회사 오너 빅터 건틀렛에게 경영권이 넘어간다. 빅터 건틀랫은 10년간 별다른 문제 없이 회사를 운영해갔고 이에 애스턴마틴의 가능성을 본 포드가 1991년 인수하게 된다. 포드 체제의 애스턴마틴은 비교적 오래 순항했다.

그러나 2006년 포드가 회사를 담보로 230억달러(한화 27조원)을 대출해야 할 정도로 경영이 악화됐다. 애스턴마틴은 재규어, 랜드로버, 볼보와 함께 매각 우선 순위에 올랐다. 이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영국의 유명 모터스포츠 엔지니어링 회사 프로드라이브의 CEO 데이비드 리처드다. 데이비드 리처드는 84,800만달러(한화 1조원)에 애스턴마틴을 인수한다. 그가 운영하는 동안 기존에 지적 받았던 품질 문제를 해결했다. 2013년 데이비드 리처드가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애스턴마틴은 이탈리아계 사모펀드 인베스트인더스리얼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메르세데스-AMG와 협력관계를 맺어 22년간 사용해오던 파워트레인을 교체했다. 현재 애스턴마틴은 캐나다 출신 F1드라이버 랜스 스트롤의 아버지이자 패션업계의 거물 억만장자 로렌스 스트롤이 인수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스트롤 가가 운영하는 레이싱 포인트 팀은 2020년부터 애스턴마틴과 협력 관계를 맺게 됐다.

자동차 제조사는 꿈과 희망을 품고 설립된다. 하지만 현실은 호락하지 않다. 회사 운영도 힘들고 운영을 잘 한다고 해도 대공황, 석유 파동, 세계 경제 불황 등 거시 경제 수준의 위기가 찾아온다. 이러한 위기를 오늘 소개한 제조사들처럼 일이 잘 풀려서 그 시기를 적절하게 잘 지나친 제조사들도 있는 반면 안타깝게 그대로 사라져버린 제조사들도 많다. 이를 통해 좋은 차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동차 제조사를 운영하려면 시기와 흐름을 잘 파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운명을 달리한 제조사들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정휘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