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가 함께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최근에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자동차 제조사들이 손을 잡고 자동차를 출시하는 일이 흔한 일이다. 하지만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어진 냉전 시대에는 이념과 경제 체제가 다른 국가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서로 협력하는 일은 보기 힘들었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냉전시대가 한창일 때 진행됐던 자동차 제조사들의 합작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또한 단순히 체제가 다를 뿐만 아니라 2차 대전 당시에 목숨을 걸고 반대편에 섰던 제조사들끼리 손잡은 사례도 살펴본다.

미쓰비시 기술을 사용한 포르쉐 944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가
함께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포르쉐 944

포르쉐는 외계인을 고문해서 자동차를 만든다고 할 정도로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자동차 제조사다. 그만큼 독자 기술이 우수하지만 필요에 따라 뛰어난 기술은 도입하기도 한다. 그렇게 제작된 대표적 차종이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생산 및 판매한 포르쉐 944. 포르쉐 944는 다름아닌 포르쉐 엔트리 스포츠카 카이맨의 전신이다.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주의 국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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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944

포르쉐가 944의 부품 중에는 미쓰비시의 벨런스 샤프트를 사용했다. 포르쉐가 미쓰비시로부터 도입한 밸런스 샤프트는 엔진의 진동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는 축을 말하는데 주로 직렬형 엔진에 사용되는 부품이다. 양쪽에서 피스톤이 상하 왕복 운동을 하며 진동을 상쇄하는 V형 엔진과 달리 직렬형 엔진은 진동이 그대로 발생하기 때문에 크랭크 샤프트와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밸런스 샤프트를 장착해 진동을 억제해야 한다. 그러나 마찰력과 관성모멘트 등의 변화로 약간의 출력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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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944

포르쉐가 이 기술을 도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포르쉐는 자사의 그랜드 투어러, 928에 탑재된 5.0리터 V8엔진을 반으로 자른 2.5리터 4기통 엔진을 엔트리급 차량들에 사용했다. 또한 해당 엔진을 개량해 4기통임에도 불구하고 2.7리터 심지어 3.0리터까지 배기량을 늘리기도 했다. 그런데 V8 엔진에서 파생된 직렬 4기통 방식이라 심한 진동 문제가 있었다. 포르쉐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있었지만 큰 돈과 시간을 소비하며 해결하는 것 보다 혁신적이라 평가 받던 미쓰비시의 밸런스 샤프트 기술을 도입하여 적용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포르쉐는 944를 제작할 때마다 미쯔비시에게 약 265달러(한화 31만 원) 상당의 개런티를 지불하면서 차량을 출시했던 것이다.

독일과 소련의 만남 VAZ 포르쉐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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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VAZ-2103

아브토바즈는 구소련 시절 설립된 러시아 자동차 제조사다. 현재는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소속되어 출시하는 차량 대부분이 르노 그룹 차종들과 플랫폼, 파워트레인을 공유한다. 하지만 소련 시절 아브토바즈는 이탈리아의 자동차 제조사 피아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1970년 피아트 124의 서스펜션을 러시아의 도로환경에 맞춰 보강하고 엠블럼만 교체해 VAZ-2101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이후 1972년 헤드라이트와 그릴, 파워트레인을 살짝 바꾼 VAZ-2102 VAZ-2103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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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Z 포르쉐 2103 외관

1975, 한창 VAZ-2103을 판매 중일 때 소련의 교통부 장관과 독일의 포르쉐 회장이 비밀리에 만나 소련산 스포츠카 개발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포르쉐는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을 소련으로 보냈다. 포르쉐에서 온 용병들은 아브토바즈로 가서 VAZ-2103을 새롭게 손봤다. 먼저 촌스러운 크롬 몰딩 대신 플라스틱 재질로 대체하고 실내에도 가죽으로 마감했으며 새로운 계기판과 포르쉐 스타일 디자인 스티어링 휠 등 기존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포르쉐 엔지니어들은 VAZ-2103의 서스펜션을 조율해 주행성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1976년 아브토바즈는 돌연 포르쉐와의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단독으로 상품성을 개선한 VAZ-2106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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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Z 포르쉐 2103 실내

1970년대는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립하던 냉전시대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인 서독에 소속된 포르쉐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자동차 제조사와 협업하려던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무산됐지만 VAZ 포르쉐 2103은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외신에서는 철의 장막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며 희망적인 내용의 기사를 내놓기도 했었다.

시트로엥과 마세라티가 만든 콰트로포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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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

태생이 럭셔리했고 현재도 럭셔리 슈퍼카의 최고로 알려진 마세라티는 1968년 경영난으로 시트로엥에게 인수된 적이 있다. 마세라티와 시트로엥은 합병했어도 제조사가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 간섭이 별로 없었고 겹치는 차종도 없었다. 하지만 마세라티의 고성능 4도어 세단 콰트로포르테의 후속을 개발하면서 시트로엥의 입김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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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로엥 SM

1963년에 출시한 1세대 콰트로포르테는 60년대 클래식함이 돋보이는 외관에 4.1리터 및 4.7리터 V8 엔진을 탑재했으며 후륜 구동 방식이었다. 4.7리터 V8 엔진 트림은 최고출력 290ps을 발휘했으며 최고속도는 255km/h였다. 또한 독립식 서스펜션과 LSD(Limited Slip Differential)까지 장착되어 있어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제법 빠른 고성능 세단이었다. 그러나 시트로엥이 제작에 참여한 2세대는 스포츠성을 버린 단순한 세단으로 변했다. 이는 당시 시트로엥은 마세라티의 3.0리터 V6엔진을 탑재한 고급 세단 SM을 출시해 큰 성공했었다. 그래서 1974 2세대 콰트로포르테도 전륜 구동 방식의 시트로엥 SM플랫폼으로 제작했다. 엔진의 출력도 210ps로 하향됐으며 최고속도 역시 200km/h로 평범한 세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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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

다행히 마세라티는 이탈리아 정부의 도움을 받아 유명 슈퍼카 제조사 드 토마소 산하로 편입된다. 이후 1979년 출시된 3세대 콰트로포르테는 1세대처럼 후륜구동으로 돌아왔으며 최고출력이 255ps 4.2리터와 280ps 4.9리터 V8 엔진을 탑재해 다시 고성능 세단으로 복귀했다. 물론 2세대 콰트로포르테가 시트로엥의 개발 참여로 차량 성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운사이징 됐지만 전장이 5,130 2013 6세대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큰 콰트로포르테라는 타이틀을 유지했다.

람보르기니가 튜닝한 닷지 바이퍼 SR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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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지 바이퍼

이탈리아의 슈퍼카 제조사 람보르기니와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 닷지도 의외로 인연이 있다. 전혀 관계 없어 보이지만 람보르기니는 1998년 아우디와 합병하기 이전에 1987년부터 1994년까지 크라이슬러 산하에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닷지와 람보르기니는 포드 GT, 쉐보레 콜벳과 함께 미국산 슈퍼카를 대표하는 닷지 바이퍼를 같이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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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지 바이퍼

바이퍼는 1992년 출시한 닷지의 슈퍼카로 8,000cc가 넘는 고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을 탑재해 단종되기 이전까지 가장 높은 배기량을 가진 차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로 이 타이틀을 물려받은 차는 8.0리터 W16 엔진을 장착한 부가티 시론이다. 이처럼 바이퍼의 엔진 배기량이 높은 이유는 원래 닷지의 풀사이즈 픽업트럭에 적용되던 엔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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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지 바이퍼 엔진

바이퍼를 제작할 당시 크라이슬러는 람보르기니에게 풀사이즈 픽업트럭에 사용되는 8.0리터 V10 엔진을 슈퍼카에 장착할 수 있도록 개조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람보르기니는 주철이었던 실린더 헤더와 엔진 블록을 알루미늄 합금으로 교체해 무게를 350kg에서 283kg으로 줄였으며 내구성도 강화했다. 그 결과 최고출력이 314ps에서 406ps로 대폭 향상됐다. 물론 람보르기니가 아우디에게 인수된 이후에도 닷지는 바이퍼의 엔진을 계속 만들며 개선했고 마지막에는 최고출력 654ps, 최대토크 83.0kg·m을 발휘하는 8.4리터 엔진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름값이 상승하고 친환경, 다운사이징 열풍이 불면서 2017년을 끝으로 단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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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지 바이퍼

국가와 국가는 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해당 국가에 소속된 제조사들도 서로의 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국가와 달리 전쟁 중에도 공생을 위해 협업할 수 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전후 냉전 시대에 진영이 다른 국가의 제조사들이 협업한 것이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다. 기술 독점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시기였고 결국 상대 제조사를 인수해 상하관계에 두려는 욕심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