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오버라는 말은 마땅히 정의하기 어려운 혼종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러나 혼란한 개념들은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므로, 그 생명력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CUV(Crossover Utility Vehicle) 라는 개념이 현재 SUV에 흡수되다시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크로스오버라는 용어라 딱 맞을만큼 혼종의 장점을 살린 자동차들은 다소 억울할지도 모른다. 이런 차종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생산됐으며 한국에도 출시됐던 혼다 크로스투어다. 비록 단종됐지만, 이 자동차가 지금의 혼다에 남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쿠페 라인을 입었던 어코드 왜건,
크로스투어
크로스투어러는 어코드 기반의 쿠페형 왜건이다. 현재 30대 초반의 세대들에게는 ‘어코드=세단’이라는 등식만이 익숙하겠지만, 1990년대만 해도 어코드는 폭스바겐의 파사트나 아우디 A6처럼 배리에이션 라인업을 가진 차였다.
어코드에 왜건 타입 바디가 적용된 것은 1980년대 후반 3세대, 일본 내수 차종의 ‘에어로덱’이라는 트림이었다. 그 이후 4세대부터 본격적으로 북미형에 왜건 라인업이 추가됐다. SUV라는 개념조차 등장하기 전, 편안한 승차감과 넉넉한 수납공간의 세단 기반 왜건은 미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부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크로스투어러의 휠베이스는 2,797㎜로 세단형 어코드와 거의 동일했고, 왜건답게 전장이 2인치 정도 긴 4,998㎜로 여유로운 공간을 자랑했다. 시트를 젖히면 풀 플랫에 가까운 공간도 확보됐다. 측면 바퀴 공간만 해결됐다면 좋은 차박 공간도 됐을 것이다.
이처럼 혼다는 재미있는 점이 많은 브랜드다. 왜건이 필요하다고는 하더라도, 냉정하게 보면 크로스투어는 개발의 당위성이 부족한 차였다. 쿠페형이긴 하지만 항력 계수가 0.36Cd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도 아니었으니 연비 향상이 목표도 아니었고, 어큐라처럼 고급화 지향도 아니었다. 물론 개발 의도는 꿈보다 해몽 식으로 더하기 나름이겠으나, 순전히 디자인에서의 새로운 시도로 보는 것이 객관적일 것이다.
역시 배기량 ’빨’?
잊을 만하면 눈에 띄는 이유
이 차는 2012년에 한국 시장에도 출시됐다. 국내 인증 기준에 맞추면서 총 전장은 5,000㎜가 됐고 가격도 4,600만 원대로 당시로서는 나름 대형 크로스오버라는 포지셔닝 대비 착한 편이었다. 독특한 디자인은 왜건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었고 그 틈으로 어코드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감을 끌어들였다. 2014년 연간 판매량은 200대를 넘기도 했는데 ‘파생상품’ 성격의 차로서는 준수한 성적이었다. 이 때 출고된 차들은 2020년 기준으로도 연식이 평균 4~6년 정도로, 아직 쌩쌩한 현역이다.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는 눈에 띄는 차량이다.
크로스투어가 한국 시장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데는 아무래도 파워트레인이 한 몫 했다. 한국 시장에서도 불과 최근 몇 년 사이에, 한 체급 위 자연흡기 엔진을 멀찍이 따돌릴 정도의 다운사이징 터보 엔진이 주류가 됐으나,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수입차 유저들의 고급차 인식은 배기량 순이었다. 어코드의 SOHC 기반 VTEC 3.5리터(3,471cc) V6 엔진은 그런 유저들의 입맛에 부합했다.
이 엔진의 최대 토크는 34.8kg·m(4,900rpm)에 달했는데 여기에 6단 자동변속기를 물렸다. 게다가공차 중량 1,800kg이 채 되지 않아 시원한 가속력을 발휘했다. 파일럿이나 오딧세이 같은 덩치를 200km/h까지 너끈히 밀어붙이는 281ps의 최고 출력도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참고로 크로스투어가 미국 시장에 최초 출시됐을 당시 3.5리터 VTEC 엔진의 최고 출력은 271ps였다. 후에 미국형에는 최고 출력 192ps의 2.4리터 직렬 4기통 엔진도 추가됐지만 국내엔 이 엔진만 단일 트림으로 판매했다.
미국 시장에서도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생산을 중단하고 재고차량만 팔았던 2016년부터는 존재감이 거의 사라졌으나, 2012년엔 2만 대 이상의 미국 시장 판매를 기록했고 2014년까지 연간 1만 6,800대 정도였다. 물론 어코드의 파생상품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혼다는 저 수치가 월간 판매기록이 되는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보자면 실패작이었고, 단종은 당연했다.
크로스투어,
단명했지만 메시지는 분명하다
어코드도 2017년에 등장한 10세대부터는 세단에만 올인하는 모양새다. 어코드뿐만 아니라 미국을 기준으로 보면 혼다의 라인업은 심플해졌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똘끼’는 다소 희석됐다. 그나마 조금 특이한 라인업의 신차는 어큐라 브랜드로 넘기고 있다. 그런 어큐라도 큰 재미를 보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차라리 크로스투어의 실험이 10세대에서 시도됐더라면 어땠을까? 혼다의 힘은 다른 메이저 브랜드와 다른 고집과 기발한 상상력에서 나왔다. N600 같은 차를 만들던 회사가 포뮬러 원에서 과감한 승부수로 우승하고, 그 기술력을 양산차로 옮겨 NSX를 만들었다. 난데없는 제트기 기술은 강력한 자체 터보엔진의 바탕이 됐다. 끝없이 매달렸던 모터 기술은 도심형 전기차 혼다 e를 낳았다.
그러나 오히려 브랜드를 대표하는 차종인 어코드나 CR-V는 오히려 그러한 상상력과는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혼다 소이치로 회장이 연구원 중 누군가에게 현몽하여 “이 차가 혼다에서 만들어진 차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이가 있을까?
크로스투어의 개념이 만약 지금의 어코드에 적용된다면 아마 ‘어코드 슈팅브레이크’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휑한 거리에 혼자 노점 영업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크로스투어와 달리, 현재는 ‘식당가’처럼 시장을 형성한 경쟁 차종도 있다. 여기에 파워트레인은 훌륭한 차별화 포인트다. 2.0리터 기반 투 모터시스템 하이브리드는 CR-V에서 성공을 거뒀고 클래리티의 FCEV 파워트레인을 적용한다면 장르 유일이란 가치도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미한 일개인이 글로벌 브랜드 순위 최상위에 위치한 제조사를 걱정하는 것이 온당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미국 세단 시장에서 어코드의 위상에, 약간이지만 위기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그 성능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에도 말이다.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힌 어코드가, 어코드만이 주던 로망, 아우라를 가진 차일까? 선택과 집중은 중요하지만 혼다 그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브랜드인지를 각성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다. 혼다의 팬들이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다.
글
한명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