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에드워드 밴 헤일런(1955. 1. 26~2020. 10. 6)이 향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동차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그는 슈퍼스타였지만 삶의 패턴은 심플했다. 기타를 치거나 작곡을 했고, 음반을 내면 세계로 투어를 다녔으며 그렇지 않으면 맥주를 들이붓듯 마셨다. 그것도 하지 않는 시간엔 차를 몰았다. 비벌리힐스 근처의 대로와 서킷을 가리지 않았다. 이제 그런 그의 모습을, 이 세상에는 간접적으로라도 볼 수 없게 됐다. 그의 삶 속에서 자동차가 갖는 상징성에 대해 간략히 돌아보며 추모를 대신한다.
DIY 장인이셨다면서요
에드워드 밴 헤일런은 사운드의 혁명가였다. 그의 기타 음색은 ‘브라운 톤(brown tone)’이라 일컬어졌다. 다소 추상적인 용어지만 밝고 선명하며 따뜻한 음색의 고출력 사운드로 합의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사운드가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미국식 하드 록의 모범을 만들었다는 데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브라운 톤은 그전까지의 사운드 개념에서는 양립하기 어려운 조건의 결합이기도 했다. 사운드가 밝다는 건 전체적으로 음의 높이가 높거나 주파수 대역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밴 헤일런의 곡들을 들어보면 1~3번 현과 하이 프렛 코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게다가 밴 헤일런이 사용한 기타의 지판은 가볍고 단단한 메이플(단풍나무)로, 이 역시 소리를 밝게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그러나 그의 밝음에는 온기가 있었다. 그 비결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조한 기타에 있었다. 넥과 헤드 사이의 넛(줄을 고정하는 홈이 있는 부품)을 브라스 소재로 바꿨고 픽업(기타에 장착된 수음 장치)에 파라핀 왁스를 발라 잡음을 줄였다. 그의 DIY는 밴 헤일런이라는 밴드가 성공가도를 달리는 동안 보다 체계화된 브랜드가 됐다. 연주뿐만 아니라 사운드 시스템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그는 여러 악기 제조사들과 협업해 자신을 상징하는 브랜드 5150, EVH를 런칭하는 밑바탕이 됐다. 참고로 5150은 그들의 대히트 앨범과 동명이자 밴 헤일런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지만, LA 경찰의 요주의 인물 코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창기 그의 기타는 소리보다도 복잡하고 아무렇게나 얽힌 듯한 화이트, 레드 패턴이으로눈길을 끌었다. 이는 그가 한 색을 칠하고 그 위에 테이프를 발라 도색한 후 다시 떼내는 과정에서 생긴 패턴이었다. 조악한 마감이지만 이것이 일렉트릭 기타를 이용한 대중음악의 한 아이콘이 됐다. 그 모습이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붕대 감은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프랑켄슈타인과 스트라토캐스터를 합친 프랑켄스트랫으로 불렸다.
음악만큼 넓었던 애마 스펙트럼
에드워드 밴 헤일런은 분명 테크니컬한 기타리스트였지만 그 테크닉은 속주만이 아니라 종합적인 사운드 아트였다. 더 나아가 그는 이 소리를 적절히 활용해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하드 록 밴드로서 드물게 싱글 차트 넘버 원 싱글과 탑 20 히트곡을 두루 보유하고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특히 그는 프렛 위를 때려서 원래 노트보다 옥타브가 높은 배음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하모닉스 주법으로 악상에 담긴 감정을 고조시키는 데 달인이었다.
그의 자동차 선택 기준도 그의 연주 성향과 닮아 있었다. 빠른 자동차를 기본적으로 선호했으나, 돌고, 멈추는 데 모두 재치가 있고 아름다운 디자인과 친숙함까지 갖춘 데일리 타입의 스포츠카를 선택했다. 트랙 주행을 즐렸던 만큼 911 GT3 RS와 같은 극강의 트랙형 머신고 람보르기니의 미우라, 페라리 575 마라넬로의 전신인 550과 1947년형 닷지 플랫베드 픽업트럭 등 스펙트럼도 넓었다.
다만 그는 자동차 수집가로 유명한 방송인 제이 레노처럼 차고에 모셔 두는 부류는 않았다. 오히려 탈 만큼 타다가 손이 더 가지 않으면 되파는, 슈퍼카 오너 치고 수집욕은 평범한 편이었다. 이 중 페라리 550은 지난 해에 매물로 나왔고 주행거리도 4만 5,000km 정도로 상태가 매우 준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순정 상태’를 그냥 두고 못 보는 그의 성격은 자동차에도 반영됐다. 그는 미국 튜닝 업계에서도 소문난 고객이었다. 미국 최대 튜닝 쇼인 세마(SEMA)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으며 서킷 주행을 좋아해 현가 장치 튜닝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수집 리스트에 있는 1996년식 993 터보도 포르쉐 전문 튜너 RUF 사의 버전이며 아우디의 R8도 배기 사운드 튜닝을 거친 것이었다.
즉 그는 여타 자동차 애호가들과 달리, 차를 모시고 사는 부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타고 싶은 차를 샀고, 그래서 실컷 달리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게 질리거나 큰 소장 가치가 없다면 팔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것인지 이 중 주요 차량들을 지난 7월 경에 매각했다. 아직 구체적인 유언이 밝혀지진 않았으나, 워낙 인물이 인물인만큼, 추후 그의 기념관을 건립한다면 이 차량들을 유족이 재구매해 보관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기타도 자동차도 언제나 온 에어
젊은 시절의 에드워드 밴 헤일런은 음주와 약물로 건강 상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다. 특히 별세의 직접적이 후두암 후유증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엄청난 애연가였다. 암을 극복했나 싶었지만 결국 몸이 견뎌내지 못했다. 세상을 떠나기 불과 수 개월 전 미국 자동차 매체 <카 앤 드라이버>와의 인터뷰 사진을 보면 연초를 전자 담배로 바꾼 정도다.
그의 목 상태는 이미 40대에 접어들어 급격히 나빠졌다. 일상화된 폭음으로 발음도 다소 어눌한 편이어서 그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 국내 대중음악 기자들과 통역들은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만능 스포츠맨이자 건실한 삶으로 유명한 보컬리스트 새미 헤이거가 밴 헤일런에 가입하자, 에드워드의 아내가 새미 헤이거에게 부탁해 제발 에드워드의 음주와 흡연을 말려달라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런 그도 연주와 자동차에 대해서만은 엄격했다. 그는 <카 앤 드라이버>와의 인터뷰에서 연주를 게을리하면 투어를 망치고, 주행 연습을 게을리 하면 반드시 코너에서 스핀하게 된다고 일갈했다. 이건 그대로 기타리스트들을 위한 것인지 모터스포츠 꿈나무들을 향한 것인지 모를 유언이 됐다.
그는 투병 중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불과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최대 악기 박람회인 NAMM 쇼에서 자신이 개발에 참여했거나 홍보한 브랜드의 제품을 소개하고 연주하는 데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래서 그의 연주는 신작보다 그 다음 앨범이, 1990년대보다 2000년대가, 최전성기보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이 더 날카로웠다.
기타로 타는 자동차의 원조?
산울림의 김창완이 기타로 오토바이를 탄다고 외치기 전, 에드워드 밴 헤일런은 기타를 통해 자동차의 다양한 면모를 형상화했다. 기타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주곡 ‘Eruption’은 줄의 장력 변화와 음향 이펙터를 결합해 자동차의 낮은 배기음을 흉내냈다. 이후 많은 록 밴드의 기타리스트들이 이런 기법을 차용했으며, 자동차 관련 프로그램의 단골 BGM으로 등장하는 머틀리 크루의 ‘Kickstart My Heart’도 이러한 주법으로 시작한다.
밴 헤일런의 히트곡인 ‘Panama’라는 곡 중간에는 날카로운 고회전의 엔진 굉음이 직접 들어갔다. 이는 다름아닌 미우라의 3.9리터 V12 엔진의 굉음이었다. 전설적 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의 디자인으로 구현된 람보르기니의 이 명차는, 7,000rpm에서 350ps의 최고 출력을 발휘했으며, 1980년대 밴 헤일런의 성공 가도를 상징하는 자동차이기도 했다. 실황에서는 전동 드라이버를 기타의 픽업에 갖다 대 비슷한 효과를 구현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많은 후배 기타리스트들이 차용한 트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