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식‘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집단으로부터 나왔다. 유저들의 문답을 통한 ‘지식인’ 서비스와 재야 ‘고수‘들의 놀이터인 블로그 그리고 2010년대부터 브랜드가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한 포스트 서비스는 네이버의 정보 층위를 두텁게 했다.
그 네이버의 역할은 점차 유튜브가 대체해가고 있다. 네이버가 지식의 ‘축적’에 적합했다면 유튜브는 그 지식의 해석과 공유에 유용한 플랫폼이다. 새로 산 가전제품이나 프로그램의 개념어로 가득한 공식 매뉴얼보다 실사용자들의 길잡이 콘텐츠가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대표적 사례다.
물론 한계도 있다. 대부분의 유튜브 콘텐츠는 철저히 주관적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노출 알고리즘의 핵심은 관심사인데, 그 관심 자체가 많은 이들의 주관에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계를 인정한 주관은 오히려 그 자체가 좋은 지식이다. 실제로 좋은 유튜버들은 자신들의 콘텐츠가 자신들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그 한계를 인정한다. 이런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튜버들은 많은 이들의 신뢰를 받고 선한 영향력을 확대 재생산한다.
반면 결코 좋은 콘텐츠라 할 수 없는 걸 만드는 유튜버들은 자신이 보는 그림자를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현상적 유사성을 본질의 동일성으로 착각하고, 또 다른 이로 하여금 그 착각을 사실이라 여기게 한다. 동력은 논리보다 목소리의 크기다. 이런 이들은 신뢰는 얻기 어려우나 신봉자들을 낳는다. 이들 역시 팔로워를 많이 모은다. 물론 그 영향력이 선하기 어렵다.
애석하게도 팔로워를 모으는 속도는 후자 측이 빠르다. 감정을 건드리고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언어학자인 월터 옹은 《문자문화와 구술문화》를 통해 밝힌 바를 응용하면 지역적문자 문화 대비 구술문화가 이성보다 감성에 의존한다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문자가 없는 일부 오지 민족들은 제의를 중심으로 한 감성의 문화로 집단을 유지해나간다. 감정과 감성 지향형 콘텐츠가 글자보다 영상의 영역에서 더욱 잘 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셈이다.
자동차 리뷰를 중심으로 하는 유튜브 채널이 늘어나고 있다. 자동차라는 소재가 아직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속물적인 시각이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성공’을 이야기하는 데 적절한 소재다. 그래서 자동차를 다루는 채널은 영상 채널에서 성장하기가 쉽다. 기존 인지도를 어느 정도 갖고 있던 인플루언서나 연예인들이라면 나름대로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들의 리뷰는 주관 중심이다. 주관 자체보다도 자신의 주관을 기정사실화하는 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나이에 상관없이 ‘내가 해 봤는데 말이야’라는 꼰대식 언설도 적지 않게 사용한다. 정비 전문가와 설계 전문가를 혼동하고 세그먼트 분류가 다른 차를 비교한다. 자신과 그 주변 몇몇 사람들의 경험을 일반화한다. 말의 수위는 차라리 별개 문제다.
이들의 문제는 어떤 차를 찬양할 때보다 비난할 때 두드러진다. A라는 차종을 비판할 때의 근거가 해당 차종의 완성도가 아니라 A라는 차량의 존재 자체이거나, 혹은 전혀 상관없고 비교 대상이라 할 수 없는 Z라는 차종의 우수성인 식이다. 어떤 제조사의 차종도 완벽하지 않지만, 적어도 비난을 받는다면 자동차가 가진 문제점을 통해 정당한 비판을 요구할 자격은 있다. 차종의 성격에 따라 지향하는 방향, 그 방향에 맞춰진 엔지니어링의 가치 자체가 ‘얘넨 그래서 안 돼’라는 식은 온당하지 않다.
당치 않은 것은 또 있다. ‘이 차는 사자마자 반값’이라는 중고가격 신봉주의다. 대부분 이들의 비난은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이 낮은 브랜드를 겨눈다. 그런 목소리는 상당수가 초고가 차종, 누구나 선망하는 슈퍼카를 찬양하는 목소리와 겹친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말하는 중고가격 하락폭은 슈퍼카 브랜드 차종에 더 부합한다.
아니, 그런 사실은 둘째 치고서라도 중고 가격은 차종의 특성보다는 시장의 특성이 더 강하게 반영된는 것 아니던가? 개별 차의 상태에 따라서도 평가는 다르다. 그런 중고 가격이 어떻게 한 차종의 가치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가관인 것은 이런 태도를 지양해야 할 기존 매체들마저 자극적 유튜버들의 오류를 거리낌없이 답습한다. 질 나쁜 경우는 사회적 공분과 관련된 이슈를 활용해 편리하게 ‘정의’와 ‘민의’라는 겉옷을 바꿔 입기까지 한다.
아직 유튜브는 방송법,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의 영역 안에 들어가는 언론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의 역할을 언론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곧 개별 유튜브 채널이 생산하는 정보를 언론에 준하는 신뢰도로 받아들이게 됐음을 뜻한다.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거기엔 책임이 따른다. 과거 우리는 기성 언론들이 그 책임은 도외시하고 대중이 쥐어 준 권력만을 휘두르는 만행을 똑똑히 봤다. 그나마 그 거대 기성 언론은 언론사 하나여서 표적이라도 분명했다.
그에 비해 유튜브의 많은 크리에이터들은 많은 사람이 큰 사람의 형상으로 뭉친 괴물, 리바이어던과 같은 상태다. 막상 어느 하나를 겨눠 잘못을 따지려면 흩어져버릴 것이고, 눈을 피하려면 너무 큰 그림자로 사람들을 덮쳐온다. 이 거인이 선한 의지를 갖길 바란다는 순진한 희망은 애초에 버렸다. 다만 찬양이든 비난이든 정확한 근거를 기반으로 하는 ‘리뷰’를 보고 싶다.
글
한명륜 기자
※ 개별 기자의 의견입니다. 온갖차는 정론지(政論誌)가 아니므로
기자들에게 통일된 논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