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때로 너무나 하찮게 중단된다.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나란히 앉은 주인공들의 방백으로만 이뤄진 것 같은 이 소설에는 소중한 사람의 삶이 그렇게 하찮게 중단된 이후 ‘껍데기만 남’아 ‘묘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 나온다. 주인공들의 어머니다. 그 어머니의 남편은 공장에서 기계에 말려들어가 한 무더기의 참혹한, 시신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한 ‘무더기’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주인공들은 남편을 잃은 엄마의 무력과 싸운다. 무력에 잠식당한 엄마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참상을 만들어낸 세상 저변의 은근하고도 힘있는 폭력에, 분노와 거부를 계속해보기로 한다.
몇 달 사이, 참혹한 사고로 어이없이 생을 마쳐야 했던 사람들의 소식이 있었다. 지난 6월 전남 여수의 한 사거리에서 자동차 탁송용 대형 화물차가 횡단보도 위의 차량과 행인들을 덮쳐 19명의 사상자를 냈다. 27일 아침에는 서울 강남 선릉역 인근 사거리에서 대형 트럭 앞으로 갑자기 끼어든 스쿠터 운전자가 치었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두 사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공포를 느꼈다. 이렇게 전지적으로 쓰는 것은, 그런 정서와 감정이 일정 수준의 지능을 가진 동물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동물들도 동종의 동물이 사고로 죽는 것을 보면 큰 외상 징후로 보이는 행동을 한다. 여수 사거리에서 얼어붙은 듯한 한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27일 강남 사고 현장에서도 그 자리에 정지해버린 차량들을 볼 수 있었다. 단지 사고로 인한 정체를 넘어 삶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모습 앞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확인했다. 거기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허구의 비극보다 서러웠을 것이다. 삶은 도로에서 끝났지만 도로 바닥 어디에서도 다시 삶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누구를, 무엇을 탓해보는 것은 갑작스럽게 중단된 삶 앞에 허망해 보인다. 누군가의 중단된 삶을 다시 일으켜세우고 이어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 허망함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게 한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 COVID-19의 장기화로 인한 배달 소비 의존도의 지나친 심화 등 굳이 말하려면 할 것이 많지만 그 어떤 말도 없어진 삶을 다시 만들어내지 못한다.
강남에서의 사고가 있기 하루 전인 8월 26일, 나는 백신 1차 접종을 했다. 미열이 있어 출근하지 않았다. 열이 가라앉아서 사고가 있던 그 날에는 출근했다. 나는 살아서 출근했고 누군가는 죽었다. 한 문장 압축해도, 삶과 죽음 사이의 캄캄한 절벽은 메워지지 않는다. 새삼 백신 접종을 권유하며 ‘위험보다 이익’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못내 미웠다. 누군가의 위험이 누군가의 이익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 그 위험을 감수한 이는 의사상자인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이 참혹한 삶과 죽음의 경계 앞에 놓여진한 무더기의 잔인한 말들과 생각 때문이다. 사고를 두고 쏟아지는 말들은 감히, 죽음이 자신에게는 찾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자신만만함이 보여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나는 트럭 제조사의 소식도 전하고 모터사이클 시장의 동향도 살피며 자동차 산업계의 눈치도 보고 있다. 그 눈치 속에서 때로 길을 잃으려 할 때, 이 참혹한 사건들은 도깨비불처럼 외면할 수 없이 환한 두려움으로 내가 선 자리를 보여 준다. 부디, 남겨진 유족들이 삶을 추스르고 슬퍼하되 고통스럽지 않길 기원한다.
-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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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창비
발매
2014.11.14.
글
한명륜 기자
※ 개별 기자의 의견입니다. 온갖차는 정론지(政論誌)가 아니므로
기자들에게 통일된 논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