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환경만이 뛰어난 연구 결과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약과 맞서 싸우면서 만들어내고 정작 그 제약을 둔 이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함에도, 의외의 지지자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D 세그먼트 이하 자동차들의 전륜 서스펜션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맥퍼슨 스트럿과 그 아버지 얼 스틸 맥퍼슨의 길이 그러했다. 자동차가 ‘바로’ 달릴 수 있도록 하는 서스펜션이, 예측하지 못할 사람의 운명 속에 녹아 있다는 아이러니, 그 역사를 만나본다.
얼 스틸 맥퍼슨(Earle Steel Macpherson, 이하 ‘맥퍼슨’)은 좌우륜 독립식 서스펜션 중 하나인 맥퍼슨 스트럿의 창안자이자 특허 보유자이다. 썰렁하리만치 심플한 이 사실은, 그러나 이 유명한 부품명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는 1891년 일리노이 주 하이랜드 파크에서 태어났는데,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가 영국 태생인 줄로 아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알려진 데는 아무래도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시기(1914. 7 ~ 1918. 11) 대부분을 유럽에 주둔한 미 육군 항공단의 항공기 엔진 기술자로 일했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대학교육을 받는 이들이 흔하지 않았던 당시 일리노이 주립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그 이듬해 졸업과 동시에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차머(Chalmer)에 들어갔다가 곧 미 육군에 입대했다. 실제로 이 당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자동차 엔지니어들이 군수 관련 엔지니어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맥퍼슨이 후일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유럽통’으로 통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이 당시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유럽에서의 복무 후 맥퍼슨은 귀국 후 자동차 공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디트로이트로 갔다. 그의 행적을 보면, 자동차 제조 분야 안에서도 다양한 회사를 경험하며 진로를 탐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리버티라는 제조사에 먼저 둥지를 틀었다. 이 회사는 후일 지프를 태어나게 한 미 육군 군용차 사업 수주전에 참여한 기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버티가 1923년 컬럼비아 자동차에 매각되자 그는 헙모빌이라는 자동차 제조사로 자리를 옮겼다. 헙모빌은 1차 대전 후 미국의 주가 상승과 함께 호황을 누렸으나, 1929년 대공황의 영향으로 타격을 크게 입었다. 게다가 이 회사의 창업주인 로버트 헙이 1931년 5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로버트 헙은 미국의 전통 있는 제조사 올즈모빌과 포드를 거친 인물이었다. 맥퍼슨은 이 회사에 10년 이상 머물러 있었는데, 로버트 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1934년 맥퍼슨이 헙모빌을 떠나 옮긴 곳이 다름아닌 포드였다는 점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안타깝게도 헙모빌은 1940년 문을 닫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GM으로 옮긴 이듬해인 1935년, 맥퍼슨은 당시 GM의 기술부사장 제임스 M. 크로포드의 눈에 들어 설계 분야의 책임자로 천거된다. 그의 아이디어와 기술적인 능력은 인정받은 것이다.
일가를 이룬 이들의 업무 성향에는 그만의 뚜렷한 시그니처라 할 만한 것이 있는데, 이는 맥퍼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자동차 분야 전문 작가인 칼 루드빅슨은 올드카 전문 매거진 <허밍스>의 단행본 <흥미로운 자동차(Special Interest Auto)>(1974)를 통해 그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불도저’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신 그는 철저하게 검증하고 실천하는, 이른바 돌다리고 두들겨 보 건너는, 그러나 그 돌다리가 안전하단 것이 확인되면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GM에서 맥퍼슨의 10년은 바쁘게 흘러갔다. 특히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GM의 공장은 군수 동원 체제였고 민간용 자동차를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맥퍼슨이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전쟁 직후였다. 그가 개발 총괄을 맡았던 자동차는 2,200 파운드(997kg)의 경량화된 프론트십 후륜구동 자동차 카뎃(Cadet)이었다. 오펠의 카뎃(kadett)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자동차는 체중이 가벼운 만큼 좌우륜이 서로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는 차축식 서스펜션으로는 안정적인 자세 제어 능력이나 조향을 만들어내기 어려웠다. 과제는 또 있었으니, 불과 48인치(1,219㎜)에 불과한 이 자동차들을 4인승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스펜션 시스템이 차지하는 크기도 작아야 했다.
당시 미국 자동차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서스펜은 숏–롱 암(SLA)이라고 불리는 방식이었다. 말 그대로 크기와 길이가 다른 상하 콘트롤 암 사이에 쇼크 업소버와 스프링을 두는 방식이다. 이 콘트롤 암의 모양은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과 비슷한데, 가볍고 조향성이 좋다는 장점은 있지만 부피가 컸다. 특히 폭이 넓어 1,200㎜ 남짓 되는 소형 자동차의 서스펜션으로는 부적합한 면이 있었다.
맥퍼슨은 과감한 구조의 변경을 통한 서스펜션 재설계를 단행한다. SLA 방식에서 어퍼 암을 없애버리고 대신 휠 스핀들 위에 상하 방향으로 막대기(strut)와 같은 구조물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 막대기의 윗부분에 쇼크 업소버를 두고 코일 스프링을 두어, 상부로 가는 충격을 완화하도록 했다. 로어 암 역시 위시본 모양을 버렸으나 안티 롤 바와 연결되며 위시본과 비슷한 구조를 갖게 됐다.
스트럿을 이용한 서스펜션은 맥퍼슨이 처음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방식의 서스펜션은 1920년대 피아트의 디자이너였던 귀도 포르나차가 먼저 개발한 것이었으며, 맥퍼슨은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서스펜션은 당시 GM의 소형차 전략에 맞지 않았다. 바로 가격 탓이었다. 지금이야 맥퍼슨 스트럿보다 비싼 서스펜션 시스템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맥퍼슨의 스트럿 방식 서스펜션은 탈착에 있어 비용이 들었다. 부품 부피가 크고 수가 많긴 했지만 기존 SLA 서스펜션은 작업자들이 그만큼 익숙했던 방식이기에, 스트럿이 부품 수의 경제성으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결국 맥퍼슨은 자신을 천거한 크로포드와 잦은 다툼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7년, GM은 카뎃의 개발을 중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상황을 눈여겨본 이가 있었다. 포드의 총괄 부사장인 어네스트 R. 브리치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GM의 부서장으로 있다가 포드로 옮긴 인물이었다. 경쟁사인 GM 내부의 혼란 속에서 능력 있는 엔지니어인 맥퍼슨의 입지 변화는 포드의 기회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947년 9월, 결국 그의 스카우트를 통해 맥퍼슨은 포드의 수석 엔지니어로 자리를 옮긴다. 이곳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49년에 이 서스펜션의 특허를 출원했으며, 1953년에 공식적으로 자신의 성을 딴 서스펜션의 특허를 갖게 됐다. ‘맥퍼슨 스트럿’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맥퍼슨 스트럿이 최초로 적용된 포드의 자동차는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만 판매되던 베데트(Vedette)라는 기종이었다. 그가 자리를 옮긴 지 15개월만인 1949년의 일이었다. 포드의 가솔린 엔진인 2,158cc V8 플랫헤드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로, 전장 4,500㎜, 휠 베이스 2,690㎜인 당시로서는 중형 세단이었다. 이후 적용된 자동차 역시 영국 포드를 통해 판매되고 있던 1,508cc 배기량의 소형 자동차 컨슬이었다. 왜 맥퍼슨의 스트럿 방식 서스펜션은 이토록 미국 자동차들과는 쉽게 인연을 맺지 못했을까? 이는 당시 포드에서 미국 내수용으로 생산하던 자동차들의 프레임이 맥퍼슨 스트럿을 채용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미국 자동차의 서스펜션으로 맥퍼슨 스트럿이 채용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었다.
유럽에서의 맥퍼슨 스트럿의 인기는 1960년대에 크게 높아졌다. 포드가 아닌 제조사에서 최초로 맥퍼슨 스트럿을 사용한 것은 세르지오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푸조 404였다. 1.5리터, 1.6리터 가솔린 직렬 4기통 엔진과 1.9리터 디젤 직렬 4기통 엔진을 장착한 이 후륜 구동 기종은 세단의 경우 전장 4,442㎜, 휠 베이스 2,650㎜를 갖고 있었으며 현재 C 세그먼트 차량들과 비슷한 크기였다. 이 자동차는 이후 504, 607을 거쳐 탄생한 508의 선조다.
하지만 맥퍼슨 스트럿을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게 된 건 포르쉐의 911을 비롯한 독일 자동차들이었다. 포르쉐는 1963년 911의 전륜 서스펜션에 처음으로 맥퍼슨 스트럿을 넣었다. 이건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맥퍼슨 스트럿은 자체의 형태로 인해 차고를 낮추는 데 한계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르쉐는 연구를 거듭해 맥퍼슨 스트럿의 장점과 포르쉐의 질주 성향 사이에서 최대의 접점을 찾아냈다.
스트럿 서스펜션에 대한 맥퍼슨의 특허권은 1973년에 종료되었다. 그러나 유럽 주요 제조사들은앞다투어 스트럿 방식의 서스펜션을 전륜에 장착하기 시작했다. 폭스바겐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일부 차종에 사용하다가, 특허권이 종료된 1973년 이후 출시된 1세대 골프부터 전륜 서스펜션을 맥퍼슨 스트럿으로 채용했다. BMW 역시 3시리즈 등 준중형 자동차들의 전륜 서스펜션으로 맥퍼슨 스트럿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이 자동차들은 전륜 구동 차량의 전륜 서스펜션에 적합한 것으로만 알려진 맥퍼슨 스트럿이, 후륜 구동의 전륜 서스펜션에서도 안정적인 차체 자세 유지와 조향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한편 1957년, 로터스의 설립자이자 엔지니어인 콜린 채프먼은 맥퍼슨 스트럿을 응용해, 두 대의 자사 경주차용 후륜 서스펜션을 제작했다. 이를 통해 후륜 서스펜션을 채프먼 스트럿이라 부르는 경우도 생겨났다.
결국 1980년대 중형 이하 세단의 전륜 서스펜션은 거의 맥퍼슨 스트럿과 그 응용 방식으로 정의되다시피 했다. 맥퍼슨은 이런 영광을 살아 생전에 다 누리지는 못했다. 그는 1960년 6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분명 엔지니어로서나 한 사람의 현대적 직업인으로서 성공한 삶이었다. 그는 사업적 판단을 이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전문 분야를 통해 조직에 에너지를 불어넣은 전형적인 장인형 직업인이었다. 그는 맥퍼슨 스트럿의 인기와 포드 유럽 차량의 성공 덕으로, 1952년 포드의 그룹 전체 부사장 직위에까지 올라 6년간 포드 그룹의 기술 개발 업무 전반을 지휘하다 1958년에 은퇴했다. 그의 부사장 직위 전임자는 어네스트 브리치의 추천을 받아들여 그를 포드로 영입한 해럴드 영렌이었다.
GM과의 아픈 기억은 그의 영광 속에서 희미해졌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1980년대가 채 되기 전에 GM도 쉐보레의 소형차 전륜 서스펜션으로 맥퍼슨 스트럿을 채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얼 S. 맥퍼슨의 삶 속의 아쉬움과 성과 그 모두, 격동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자동차의 역사가 만들어낸 하나의 풍경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