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르부르크링에서 세운 특별한 랩 타임

해외의 유명 서킷에서는 내로라하는 자동차들이 0.1초를 두고 싸운다. 서킷과 같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곳에서의 0.1초는 생각보다 차이가 크며, 이를 단축하는 데도 상당한 기술력을 요한다. 또한, 서킷 주행은 험로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가혹 주행인데, 많은 코너와 수시로 바뀌는 노면 조건 및 고저차 등은 자동차의 내구성과 밸런스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까닭이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가혹하기로 소문난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의 기록 중 의미 있는 랩 타임과 그 주인공인 자동차를 소개한다.

그린 헬, 그곳은 어디인가

뉘르부르크링은 독일 중서부의 소도시 뉘르부르크(Nürburg)에 위치한 장거리 서킷이다. 세계 3대내구레이스인 뉘르부르크링 24시의 무대이기도 한 이곳은 1927년 개장했다. 당시에는 총 길이 22.8km의 북쪽코스인 노르트슐라이페와 7.7km 길이의 남쪽코스인 쥐트슐라이페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험난한 코스 구성으로 드라이버들의 사망사고가 빈발했다. 1980년대에 코너의 수를 줄이고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했다. 또한 남쪽 코스를 없앤 대신 GP코스를 건설했으며, 코너의 개수는 줄이되 코스의 폭은 넓 1984년에 재개장했다.

주된 테스트 무대로 사용하는 코스는 북쪽 코스인 노르트슐라이페로, 20.8km의 길이와 172개의 코너 및 최대 300m의 고저차를 갖고 있다. 녹색 나무로 울창한 산이다 보니 안개가 잦으며 낮에도 어두컴컴한 구간이 적지 않다. 많은 사망 사고로 인해 운전자를 집어삼키는 녹색지옥이라는 뜻의 그린 헬이라고도 불린다. 서킷의 노면에는 여러 낙서와 사망자의 이름이 적혀있기도 하다. 현재는 과거처럼 사망사고가 잦지는 않으나, 여전히 뉘르부르크링 24시 경기에서 완주율은 50~60%대로 험난하다.


뉘르부르크링에서 세운 특별한 랩 타임
노면의 낙서 중에는 뉘르부르크링에서 사망한 사람의 이름도 적혀 있다
전륜 구동의 한계를 이겨낸 머신들

FF(앞 엔진, 전륜 구동)레이아웃의 자동차는 언더스티어 경향으로 인해 급격한 코너링에 다소 약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는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파워트레인의 무게와 이로 인한 관성이 전륜의 조향에 영향을 미치는 까닭이다. 또한, 앞바퀴가 가속 및 조향을 겸하기 때문에, 코너링 시 이를 동시에 활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런 일반론적 한계를 딛고 서킷에서 좋은 기록을 세운 대표적 자동차가 바로 르노 메간이다. 르노 메간은 폭스바겐 골프와 혼다 시빅 등이 포진해있는 C세그먼트의 핫 해치. 메간 RS 275 트로피는 최고 출력 275hp(5,500rpm), 최대 토크 36.7kgm(3,000rpm)를 발휘하는 직렬 4기통 2.0리터(1,998cc)터보 엔진과 6단 수동변속기를 조합해 2014 6, 전륜 구동 양산 차량 중 가장 빠른 기록인 7 54 36 1랩을 완주했다.


 하지만 뉘르부르크링에서 가장 빠른 전륜 구동 양산차라는 타이틀은 2015 3, 혼다 시빅 타입R이 등장하면서 내려놓아야 했다. 혼다 시빅 타입R은 메간 RS 275 트로피와 비슷한 사양의 직렬 4기통 2.0리터(1,996cc) 터보 엔진으로, 더 높은 최고 출력 310hp(6,500rpm), 최대 토크 40.8kgm(2,500 ~4,500rpm)를 발휘했다. 시빅 타입R이 세운 뉘르부르크링 랩 타임은 7 50 63였다.

현재 뉘르부르크링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가진 전륜 구동 차량은 직렬 4기통 2.0리터(1,984cc)터보 엔진으로 최고 출력 310hp(5,800~6,500rpm), 최대 토크 38.7kg·m(1,700~5,300rpm)를 발휘하는 폭스바겐의 골프 GTI 클럽스포츠S. 이 차량의 뉘르부르크링 랩 타임은 7 47 19. 뉘르부르크링을 달린 자동차들 중 전체 75위에 해당하며, 최고 출력이 60hp가량 높은 후륜 구동의 BMW M2 쿠페보다도 4초 가량 빠른 랩 타임이다. 이와 같은 기록의 비결은 역시 경량화와 타이어였다. 골프 GTI 클럽스포츠S는 주행에 불필요한 부품들을 과감히 탈거하고, UHP(초고성능, Ultra High Performance)타이어로 꼽히는 미쉐린 스포츠 컵2 타이어를 장착했다.

스포츠카 부럽지 않은 고성능 세단

4도어 세단은 가장 보편적이고 활용도가 높은 장르다. 가족 중심의 자동차가 될 수도 있지만 고성능 자동차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4도어 세단 중 가장 빠른 차로 꼽혔던 것은 캐딜락의 2세대 CTS-V였다. 이 자동차는 최고 출력 556hp(6,100rpm), 최대 토크 76.2kg·m(3,800rpm)를 발휘하는 V8 6.2리터(6,162cc) 슈퍼차저 엔진을 탑재했으며, 2008 5월에 7 59 32를 기록했다. 당시 자동차 미디어와 산업 관계자들은 메르세데스 벤츠 E63 AMG BMW M5, 아우디 RS6 등의 강력한 독일의 라이벌들을 제친 것에 더해, 8분대의 벽을 깼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현재 가장 빠른 양산 4도어 세단이라는 타이틀은 알파로메오 줄리아 콰드리폴리오가 차지하고 있다. 줄리아 콰드리폴리오는 지난 2016 9월에 7 32초라는 랩 타임을 기록하며, 포르쉐 파나메라 터보 7 38, BMW M4 7 52초 등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이는 2015년에 자신이 세운 7 39초보다도 7초나 빠른 기록으로, 레이싱 혈통임을 증명해냈다. 한편, 줄리아 콰드리폴리오는 최고 출력 503hp(6,500rpm), 최대 토크 61kgm(2,500rpm)를 불과 V6 2.9리터(2,891cc)의 엔진에 트윈 터보차저를 조합해 구현했다.

SUV가 느리다는 건 편견

SUV는 전고가 높아 코너링 시 롤링이 심하며, 고속 안정감도 떨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SUV도 고성능 버전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재규어 랜드로버의 고성능 디비전인 SVO의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이 대표적이다. 550hp(6,000rpm), 최대 토크 69.4kgm(3,500 ~4,000rpm)를 발휘하는 V8 5.0리터(5,000cc) 슈퍼차저 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를 장착해 파워트레인을 이룬다. 공차중량이 2,445kg에 달하는 거구임에도 지난 2014 7, 뉘르부르크링에서 8 14초를 기록하며 가장 빠른 SUV라는 타이틀을 달성했다. 이는 X6M이 갖고 있었던 8 24초의 기록을 무려 10초를 단축한 셈이다.

하지만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은 가장 빠른 SUV라는 타이틀을 포르쉐 카이엔 터보S에게 불과 6개월 만에 넘겨주었다. 카이엔 터보 S는 최고 출력 570hp(6,000rpm), 최대 토크 81.6kgm(2,500~4,000 rpm)를 발휘하는 V8 4.8리터(4,806cc) 트윈 터보 엔진을 탑재했으며, 8단 자동변속기를 결합해 파워트레인을 구성했다. 이를 토대로 2,310kg에 달하는 중량에도 0100km/h까지 가속 시간이 4.1초에 불과하며 최고시속 284km/h를 자랑한다. 이 자동차의 랩 타임은 7 59 74에 불과했다. 이는 양산 SUV중 가장 빠른 기록이자, 유일한 7분대 기록이다.

바래지 않은 20세기의 기록

현재의 자동차 발전 상황을 볼 때 15~25년 전의 차량을 현재 자동차와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뉘르부르크링 랩 타임 100위 안에는 15년 이상 머물러 있는 자동차가 8대나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스포츠카 2대를 소개한다.
 
재규어 XJ220 20세기의 대표적인 스포츠카 중 한대로 꼽힌다. 이 자동차에는 당시 최고로 여겨지던 페라리 F40과 포르쉐 959 등의 경쟁자들을 넘어서기 위한 모든 기술력이 투입되었다. XJ220 V6 3.5리터(3,498cc)트윈 터보 엔진을 탑재하고 최고 출력 542hp(7,000rpm), 최대 토크 65.7kgm (4,500rpm)를 발휘했다. 여기에 5단 변속기를 탑재해, 이름에서처럼 최고속도 220마일( 354km/h)을 달성했다. 이를 기반으로 XJ220은 뉘르부르크링 한 바퀴를 7 46 37만에 주파했다. 이 기록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70위에 랭크돼 있다.

지난 2002, 페라리는 자사의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400대 한정으로 엔초 페라리를 출시했다. 엔초 페라리는 최고 출력 660hp(7,800rpm), 최대 토크 67kgm(5,500rpm)를 발휘하는 V12 6.0리터(5,998cc) 자연흡기 엔진과 6단 시퀀셜 변속기를 결합해 파워트레인을 구성했다. V12 6.0리터라는 고배기량의 엔진을 장착했음에도 무게는 1,365kg에 불과했다. 엔초 페라리는 7 25 21의 기록을 갖고 있는데, 이는 2011년에 출시한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의 기록보다 불과 0.21초 느린 것이다.


UFC선수들이 챔피언 벨트를 가져오거나 지키기 위해 옥타곤에서 혈투를 벌이는 것처럼, 자동차들도 뉘르부르크링이라는 무대에서 랩 타임을 달성하기 위해 자동차를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레이스를 한다. 경쟁 차량보다 단축된 랩 타임은 기술력 입증의 자료이자 효과적인 마케팅의 테마가 되기도 한다. 지금도 자동차 제조사들은 뉘르부르크링을 비롯한 서킷에서의 랩 타임을 단축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따라서, 경쟁 차량보다 뉘르부르크링을 더욱 빠른 시간에 주파했다는 기사는 끊임없이 보도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내구레이스와를 연상케 한다.


이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