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에 의한 자동차 양산 시스템이 자리잡은 후, 자동차 기업의 오래 된 미덕은 많이 만들어 많이 파는 것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로벌 1,000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세계 인구의 수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기록인 듯하지만, 지금까지 1,000만 대 판매를 기록한 기종은 약 20종 안팎에 불과하다. 소비자가 원하는 주행성능과 승차감, 효율적인 가격 등의 가치를 적어도 10여년 이상 꾸준히 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꿈의 1,000만대 판매량을 기록한 자동차는 어떤 기종들일까?
1,000만 대 판매가 제일 쉬웠어요, 폭스바겐
단일 차종 1,000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자동차를 가장 많이 보유한 제조사는 폭스바겐이다. 비틀로부터 시작해 다른 제조사들은 한 대도 갖기 쉽지 않은 1,000만 대 판매 차량을 복수로 보유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골프의 판매량은 타 제조사 및 기종과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출시 이후 현재까지 7번의 세대교체를 거치면서 꾸준히 베스트셀링카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미 2세대 기종에서 전세계 판매량 1,000만 대를 기록한 바 있으며, 현재 3,000만 대 이상의 누적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업적이 가능했던 것은 골프가 해치백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 시장 자체가 된 기종인 까닭이다. 물론 이후 경쟁자들이 등장했지만 어떤 기종도 해치백 시장에서 골프를 넘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경쟁자들은 골프라는 ‘시장’의 존재감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다. 폭스바겐의 골프는 지금도 전세계 해치백 자동차 판매량의 30%를 차지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판매 정지 상태이지만, 골프는 국내에서도 어지간한 국산 차종보다 많이 팔리는 자동차로 손꼽힌 바 있다.
국내에서 골프만큼의 인기는 없지만, 전세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폭스바겐의 자동차가 소형 해치백인 폴로다. 1975년 첫 선을 보였으니 골프의 연년생 동생인 셈이다. 폴로는 2세대 생산 시기이던 1983년 100만 대, 그리고 1986년에는 200만 대를 돌파했다. 2009년부터 생산된 5세대 기종부터는 아우디의 A1, 세아트의 이비자, 스코다 파비아와 플랫폼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미 1,200만 대의 판매량을 넘어섰다. 오는 9월 14일부터 24일까지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6세대의 폴로를 선보일 예정이다. 폭스바겐은 지난 4월 말 비엔나에서 열린 제38회 비엔나 모터 심포지움에서, 90hp의 최고출력과 배기량 대비 강한 최대 토크를 발휘하는 1.0리터 가솔린 터보 혹은 CNG 엔진에 대한 청사진을 공개했다. 이 엔진은 폴로의 차세대 동력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1,000만 vs 1,000만! 혼다 어코드와 토요타 캠리
일본 자동차 제조사 중에도 1,000만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기종을 복수로 보유한 제조사들이 있다. 혼다와 토요타가 대표적이다. 비록 한국에서 인기가 높지는 않지만 세계에서 일본 자동차 산업의 위상은 체감하는 것 이상이다.
1976년 첫 선을 보인 혼다의 어코드는 2000년대 후반 이미 판매량 1,000만 대를 돌파했다. 세계적으로 높은 판매고를 기록한 기종들도 그렇지만, 혼다 어코드의 성공에는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이 큰 역할을 했다. 어코드 이전까지 혼다가 시빅 해치백 등에서 선보였던 것은 간결하고 실용적 디자인과 조향 성능 등 유럽적 가치였다. 그에 비해 어코드는 여유로운 실내 공간 및 부드러운 서스펜션과 스티어링으로 인한 안락감으로 미국 소비자들이 중시하는 가치에 부응했다. 그러면서도 시대에 따라 다양한 첨단 기술을 조화시켰다. 7세대(2003~2007)에 이르러서는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도입하면서 첨예해진 환경 영향 이슈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했고, 9세대 페이스리프트 차량에서는 자율주행 시대를 예고하는 첨단 시스템인 혼다 센싱을 통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혼다는 전세계 주요 자동차 전문매체 및 소비자 단체로부터 우수한 평가를 받아 왔으며, 특히2015년에는 미국 <컨슈머리포트> 조사 결과 내구성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혼다 어코드와 중형 세단 분야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는 토요타의 캠리도 2013년 1,000만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지금이야 캠리라는 이름이 익숙하지만 1982년 이 자동차가 첫 선을 보였을 때만 하더라도 이름이 기이하다는 평이 많았다고 한다. 토요타는 세단 차량에 왕관을 의미하는 영문이나 라틴어 단어들을 사용해 왔는데, 코롤라, 코로나, 티아라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캠리는 왕관의 일본어인 칸무리(かんむり, 관(冠))을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1983년, 미국에서 5만 여대를 판매한 것을 시작으로 캠리는 꾸준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1985년 처음으로 판매량 10만 대를 기록한 이후 현재까지 한 번도 30만 대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다. 참고로, 토요타는 1980년대 초반 오일 쇼크 이후 포드 측에 솔깃한 제안을 건넸다. 포드의 공장에서 소형 자동차를 위시한 토요타의 주력 기종들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 중에는 캠리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토요타의 기술력을 경계 어린 눈으로 본 포드는, 후일 토요타 각 기종이 성장해 자사 기종에 대한 잠식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고 결국 두 기업의 협상은 중단됐다. 캠리의 성과를 생각한다면, 포드가 혜안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브리드로만 1,000만 대, 토요타 프리우스
1997년에 등장한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는 출시 20년째인 2017년에 글로벌 판매량 1,000만 대를 달성했다. 특히 프리우스의 판매 기록은 500만대 씩 나눠볼 때 흥미로운 점이 있다. 출시 시점부터 500만 대를 판매하는 데는 16년이 걸렸지만, 나머지 500만 대를 채우는 데는 불과 4년이 걸렸다.
이를 단지 배기가스 감축 등 환경 이슈,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에 대한 관심 제고만으로 해석한다면 프리우스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프리우스는 하이브리드라는 영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었고, 언제나 ‘미래’로 이야기되던 친환경차, 전동 파워트레인의 영역을 현재의 현실세계 안으로 끌어들였다. 해치백 자동차들이 골프에게 그러하듯, 지금의 거의 모든 하이브리드 자동차들은 토요타 프리우스에게 빚진 바가 크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내수 판매량과 미국 및 글로벌 시장에서의 판매 비중 차이이다. 미국 시장 판매가 시작된 시점인 2000년부터 2004년까지는 일본 내수 판매량이 북미 판매량보다 높았다. 그러나 2005년부터 북미 시장에서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상황이 역전됐고, 북미 지역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판매량이 일본 내수 판매량의 3배를 넘던 해도 있었다. 그러다 다시 2009년부터 현재까지는 일본 내수 시장에서의 판매량이 미국 시장 판매량을 2배 이상 넘어섰다. 즉 최근 프리우스의 눈부신 약진은 내수 시장의 공이 컸던 셈이다.
현재 토요타 프리우스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가진 PHV를 출시했다. 귀여운 표정 연기와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기법을 통해 일본 최고의 광고 모델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시하라 사토미가 등장한 광고는 벌써 국내에서도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물론 68km/L대의 연비로, 국내 출시 여부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많이 만들고 많이 판 차의 시초, 포드 모델 T
포드는 양산과 대량 판매의 기본 개념을 세운 자동차 제조사다. 기존 자동차들이 부유층의 수요에 맞춰, 한 명의 장인과 도제 서너 명이 제작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담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포드는 각 부분마다의 작업자들을 컨베이어 벨트 앞에 배치하고 한 부품만 만들도록 했다. 이런 경우 한 작업자가 완벽한 숙련도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당시 포드는 손재주가 전혀 없는 상태의 작업자가 아니라면 모두 채용했고, 그들이 최소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했다.
모델 T는 이런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1,000만대 판매 기종이기에 더욱 특별하다. 1908년부터 1927년까지 생산된 모델 T는 약 1,500만대 이상이 판매됐고 폭스바겐의 비틀이 세상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 판매량의 기준이었다. 또한 미국의 산업화를 가속화시키고 자동차 산업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부를 늘린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영화 <그랜토리노>에서 주인공 월트 코월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가 보여 준 포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대다수 미국인들의 포드에 대한 감정이기도 한데, 그러한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델 T가 단지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많이 팔린 자동차는 아니었다. 당시 모델 T에 적용된 스프링 서스펜션은 도로 포장 상태가 좋지 않았던 미국 도로 사정에 부합했다. 또한 11~13km/L 정도로 알려진 연비 역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이었다. 2.9리터의 직렬 4기통 엔진이 보인 출력은 20hp 정도였지만 당시 자동차 선진국이었던 독일이나 프랑스의 자동차들에 못지 않은 성능을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1909년 당시 모델 T의 가격은 약 825달러였는데 이는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만 2,000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국 자동차 중 유일한 1,000만 대 기종, 현대 아반떼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도 반 세기를 넘은 만큼, 국내 제조사 차량 중에도 글로벌 1,000만 대를 넘은 기종이 있다. 2014년 1,000만 대 판매를 기록한 현대자동차 아반떼(수출명 엘란트라) 가 그것이다. 판매기록은 1990년 엘란트라부터 집계한 수치로, 현재 5세대 차종 생산 중인 아반떼는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합리적 가격 대비 돋보이는 동력 성능 등으로 대중에게 어필했다. 아반떼의 글로벌 판매량 중 해외 판매량의 비중은 70%에 달하는데, 역시 미국 시장에서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가격뿐만 아니라 품질에서도 개선을 이뤄 2012년 ‘북미 올해의 차’, 2016년 컨슈머 리포트의 추천차량에 선정되는 등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아반떼 외에, 1,000만 대 판매량을 가시권에 두고 있는 국내 차종은 쏘나타라 할 수 있다. 1985년 스텔라의 최고급 트림으로 등장했던 쏘나타의 누적 판매량은 이미 출시 30주년이던 2015년에 700만 대를 돌파한 바 있다. 쏘나타는 아반떼에 비해 국내 시장에서의 판매량과 글로벌 판매량의 비중이 대등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축구 선수가 국가 대표로서 A매치 경기를 100경기를 소화하면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할 조건이 된다. 이는 축구선수 본인뿐만 아니라 해당 국가 축구계 전체의 경사로 평가되는데, 꾸준한 경쟁력과 수준 높은 경기력을 적어도 10년 이상 유지해야만 가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있어 1,000만 대 판매 기록은 축구 선수에게 있어 A 매치 100경기 출장만큼이나 꾸준한 경쟁력과 생명력을 발휘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동차는 ‘믿을 만한 자동차’로서 소비자들에게 다시 선택을 받을 확률이 커지고, 판매량 자체가 또 다시 판매량 증가의 요인이 된다.
글
김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