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동차 제조사들은 직∙간접적인 경쟁 관계에 있다. 하지만 신차 개발에 있어서는 과감한 협업을 택하기도 한다. 한 대에 통상 3~4년 이상의 시간과 최대 수천억 원에 달하는 연구비가 들어가는 신차 개발은 투자이기도 하지만, 해당 자동차가 시장에서 실패할 경우 기업의 병변이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달콤한 성과를 독점하는 기쁨을 나누더라도 최대한 위험을 회피하고자 한 제조사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탄생한 자동차들을 살펴본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채무자 안토니오에게 심장에 가장 가까운 살을 요구하는 비정한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제조사들 사이에서 자동차의 심장과 척추라 할 수 있는 파워트레인 공유는 받는 쪽과 건네는 쪽 모두 윈윈을 목표로 한다. 파워트레인 분야는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까닭에, 기술력에 목마른 제조사는 개발비의 리스크 감소를, 기술력은 높지만 시장 점유율이 낮은 제조사는 로열티 수입을 챙길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폭스바겐 산하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아우디 R8과 람보르기니 우라칸이 대표적이다. R8은 2006년 출시 당시 자사의 V8 4.2리터(4,163cc) 자연흡기 엔진을 장착했다. 420hp의 최고 출력으로 당시의 자연흡기 엔진 치고는 상당한 고출력이었지만, 초고성능 슈퍼카를 지향하는 소비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아우디는 2009년, 가야르도의 5.2리터(5.204cc) V10 심장을 이식했다. 참고로 가야르도는 560hp의 최고 출력과 55kg∙m의 최대 토크를 발휘했는데, R8은 최고 출력을 다소 조정해 525hp의 최고 출력과 54.1kg∙m의 최대 토크를 발휘했다. 이후 2016년에 풀체인지를 거친 2세대 R8은 가야르도의 후속 기종인 우라칸의 엔진을 탑재했다. 같은 엔진이지만 두 차종은 확연히 다른 디자인 언어와 각 제조사의 전통을 기반으로 개별 기종으로서도 인기를 얻었으며, 그룹 안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슈퍼카 제조사들은 심장의 공유에 있어 의외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천문학적인 가격과 독특한 변속기 레버 디자인이 잘 알려져 있는 스포츠카 제조사 파가니는 AMG의 엔진을 사용한다. 이들이 AMG의 심장을 이식받은 것은 1999년에 출시한 존다 C12때부터로, 존다 S와 존다 F에 이 엔진을 계속 사용해 왔다. 이후 출시한 와이라에 장착된 730hp, 최대 토크 102kg∙m의 V12 6.0리터(5,987cc) 트윈 터보 엔진도 AMG의 것이다.
모기업 자체가 다름에도 플랫폼을 공급받는 방식으로 신차를 개발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한 제조사가 특정 세그먼트에 해당하는 기술력이나 데이터가 없거나, 화제성과 시장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의 소산이다.
소형 전륜 구동 해치백 및 크로스오버 SUV를 포트폴리오에 추가하려던 인피니티가 다임러 그룹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전자에 해당하는 사례다. 르노 닛산 얼라이언스는 다임러 그룹과의 기술 제휴로 소형 전륜 구동 플랫폼인 MFA(Modular Front Architecture) 및 직렬 4기통 2.2리터(2,143cc) 디젤 터보 엔진인 OM651, 직렬 4기통 1.6리터(1,595cc) 혹은 2.0리터(1,991cc) 가솔린 터보 엔진인 M270을 공급받고 있다. 물론 이 파워트레인의 핵심인 7단 DCT도 포함한다. 즉, 디자인과 내장재, 차량 세팅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임러의 기술인 셈이다. 이 중 최고 출력 211hp, 최대 토크 35.7kg∙m를 발휘하는 Q30은 지난 1월에 출시 후, 인피니티의 국내 판매량을 80%가량 높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2017년 1월 북미 오토쇼에서 메르세데스 벤츠의 디터 체제 회장은 더 이상 인피니티에 소형차 제작을 위한 기술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인피니티가 Q30을 통해 얻은 기술력으로 자체 제작의 후속 기종을 발표할 수 있을지도 흥미로운 부분이 될 것이다.
2018년 출시될 것으로 예상되는 BMW의 Z5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토요타의 수프라 역시 두 제조사의 협업으로 개발 중인 자동차다. 두 제조사는 섀시를 공동으로 개발했으며, 파워트레인과 서스펜션 등을 공유할 것으로 알려졌다. 파워트레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행 BMW의 3.0리터 직렬 6기통 터보 엔진, 2.0리터 엔진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해외 유력 자동차 매체들은 각자 믿을 만한 소식통을 통해 최고 출력 400hp의 최고 출력과 41.5kg∙m의 최대 토크를 발휘하는 신형 V6 트윈 터보 엔진이 장착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공식적인 정보는 아니다. 다만 이 자동차가 완성되면 BMW에서는 Z5로, 토요타에서는 수프라라는 명칭으로 불릴 예정이라는 것은 비교적 확실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Z5는 BMW 미드십 스포츠카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Z4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8년부터 2002년까지 생산된 수프라는 단종 이후 16만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셈이다. 2018년이라는 출시 계획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해외에서는 위장막을 쓴 스파이샷이 속속 제보되고 있다.
알파로메오가 지난 2006년에 선보인 8C 컴페티치오네(Competizione)는 페라리와 마세라티, 그리고 알파로메오까지 이탈리아의 3개 제조사가 개발에 뜻을 모은 스포츠카로 유명하다. 8C 컴페티치오네의 플랫폼은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의 것이다. 또한 원래 최고 출력이 405hp였던 그란투리스모의 V8 4.7리터(4,691cc) 자연흡기 엔진은 페라리가 튜닝해 444hp의 최고 출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외에 디자인과 섀시, 브레이크, 서스펜션 등은 알파로메오가 담당했다. 실제로 8c 컴페티치오네와 그란투리스모를 비교해보면, 외관 라인과 엔진 커버 등이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국제적으로 민감한 정치∙경제적 사안에 대해서는 다자 간 협력이 필수적이다. 인류애의 발로라기보다 그것이 자국에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자동차 제조사들도 다자 간 공조를 진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연히 자사의 이익을 위해서다.
1990년대 중반의 BT-57이라 불리는 월드카 프로젝트는 일본의 마쯔다, 그리고 마쯔다와 기술 협력 관계에 있던 한국의 기아자동차와 미국의 포드가 삼각 공조 체제로 진행한 대표적 사례다. 마쯔다는 설계를 맡고 기아자동차가 생산, 포드가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다름 아닌 기아자동차의 아벨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으며, 포드에서는 페스티바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다. 참고로 페스티바의 2세대는 애스파이어라는 이름으로도 판매되었다. 마쯔다는 121이라는 차량으로 일본 외의 지역에만 출시했는데, 이 자동차는 후일 데미오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 세 제조사들의 공조는 BT-57이 처음이 아니며, 이와 같은 삼각 공조로 프라이드를 개발해 성공시킨 바 있다. 세 제조사가 각자의 역량에 맞는 역할 분담으로 성과를 낸 것은, 이러한 프라이드의 제작 선례를 통해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을 잘 파악한 덕분이었다. 포드는 글로벌 제조사답게 넓은 판매망을, 마쯔다는 일본차 특유의 기계성능을 잘 살린 셈이었다.
최근에는 미래의 자동차로 평가받는 스마트 카와 전기차의 기술력이 빠른 속도로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합작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이전의 사례와 달라진 점으로는 자동차 제조사간의 협업이 아닌, 자동차 제조사와 IT관련 기업의 협업이라는 것이다. 지난 2014년 6월에 구글의 주도하에 설립한 OAA(Open Automotive Alliance)가 좋은 예다. OAA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자동차에 결합한 스마트 카 제작을 목표로 한다. 특히 OAA는 1:1 협업이 아닌, 글로벌 커넥티드 카 연합과 IT 기업 연합의 복합적 컬래버레이션으로 볼 수 있다. 현재 OAA 와 협력 중인 자동차 제조사는 벤틀리와 아우디, 캐딜락, 쉐보레, 포드, 재규어, 현대자동차, 혼다, 코닉세그, 람보르기니, 푸조, 볼보 등 50여 곳에 이른다. 또한 알파인, 가민, 콘티넨탈, 덴소, 하만, LG, 엔비디아, 소니, 파나소닉, 파라마운트 오토모티브 등 18개의 IT기업이 기술파트너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커넥티드 카의 기술을 빠른 시간 안에 표준화하고, 시장을 형성하기 위한 다자간 윈윈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동차 업계에서 경쟁사는 필요에 따라 적이 아니라 한 제조사가 갖고 있는 리스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기도 한다. 특히 미래의 모빌리티는 기술력의 융합을 절대적 전제 조건으로 한다. 어쩌면 가까운 시간 안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규모와 형태의 협업 소식을 듣게 될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흐름이 소비자들의 선택권 다양화와 신기술이 적용된 차량의 구매 비용 합리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글
이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