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있을까? 택시는 버스나 지하철처럼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실어나르는 대중교통과는 또 다른 편의성을 제공한다. 급할 때나 짐이 많을 때, 음주 등으로 인해 자가용 운전이 불가능할 때 택시는 구세주 역할을 한다. 특히 ‘빨리빨리’의 습성을 버릴 수 없는 한국인들에게 택시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번 콘텐츠에서는 한국의 택시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발전해왔는지 그 흐름과 최근의 동향을 살펴본다.
국내의 도로에 택시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19년이다. 고종황제의 어차(御車)로 도입된 포드의 모델 A가 국내에 ‘자동차’의 존재를 처음 알린지 16년만의 일이다. 기업형 택시 시스템을 한국에 최초로 도입한 사람은 일본인인 노무라 겐조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닷지의 자동차 2대로 <경성택시회사>를 설립했다. 물론 1912년에 이봉래와 일본인 2명이 포드의 모델 T 2대를 들여온 것이 최초의 택시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택시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카쉐어링의 개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당시 택시의 요금은 얼마였을까? 놀랍게도 쌀 한 가마니 가격에 달했다. 따라서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택시의 수가 증가한 것은 1950년대에 미군이 사용했던 윌리스 MB를 기반으로 제작한 시발자동차 때부터다. 시발자동차는 1955년 당시 경복궁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 및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붐은 판매량 3,000대라는 진기록을 낳았고, 이 중의 상당수가 시발택시로 제작되었다.
1962년에는 새나라공업주식회사가 닛산의 1세대 블루버드를 수입했다. 초기에는 블루버드 완제품 400대를 면세로 수입했으며, 이후에는 반제품 상태의 블루버드를 수입해 완성차로 조립 및 판매하는 방식을 이용했다. 유려한 곡선을 포함해 새로운 면모를 보인 블루버드는 새로운 디자인 감각으로 시발택시를 빠르게 대체해 나갔다.
그러나 블루버드를 둘러싼 상황은 이름이나 외관처럼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블루버드는 아시아 영화제와 관련해, 외국 귀빈의 편의성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400대 전량이 택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중 150대만이 외국인 관광용으로 허가 받은 것이었고, 나머지 250대는 일반 관광용이라는 조건으로 면세 허가를 받은 것으로, 최초의 신고 목적과 달리 용도를 전용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블루버드 택시 역시 수명이 길지 않았던 데다 당시 새나라공업주식회사 경영진은 세제 혜택과 택시사업 수입으로 얻은 이익금을 들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정치권과 결탁이 있었는지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는 등 끝이 좋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 차종 다양화로 인해, 다양한 차종들의 격전이 시작되었다. 신진자동차가 토요타와 기술제휴를 맺어 생산한 코로나와 현대자동차가 포드 영국법인과 기술계약을 체결해 출시한 코티나가 대표적이었다. 초반에는 코로나의의 우세였다. 코티나는 코로나에 비해 실내공간이 넓고, 배기량이 컸으며, 다양한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었지만, 21%가량의 부품을 국산화시킨 코로나의 가격 경쟁력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코티나는 국내 실정에 맞지 않는 서스펜션 세팅과 얼터네이터 결함 의혹이 제기되는 등 품질 문제가 불거졌다. 여기에 1970년 부산택시사업조합에서는 코티나의 결함으로 인한 5,657만 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신차교환과 5,657만원의 보상액을 요구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코티나는 승용차로서는 인기가 높았지만 택시로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1975년부터는 마쯔다의 파밀리아를 들여와 생산한 기아자동차의 브리사가 판도를 바꾸었다. 브리사는 출시부터 자가용과 영업용으로 분리해 판매하는 선진적인 전략을 택했다. 또한, 직렬 4기통 1.0리터 엔진을 적용해 연비가 좋았고, 국산화율이 80%에 달해 부품의 가격도 저렴했다. 이후 1977년, 브리사에 LPG엔진을 장착하게 해 달라는 운수 업계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브리사는 택시로서 높은 수익률을 안겨주는 자동차로 인기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브리사는 1981년, 정부가 차종의 통·폐합을 강제화하는 자동차공업합리화조치에 의해 갑작스럽게 강제 단종되었다.
브리사의 빈자리는 현대자동차의 포니 택시가 메꾸게 되었다. 포니는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1976년 2월부터 출고를 시작했다. 포니는 이탈 디자인 소속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을 맡았으며, 최고 출력 80hp를 발휘하는 미쓰비시의 직렬 4기통 1.2리터(1,238cc) 엔진을 장착했다. 여기에 75%에 달하는 부품의 국산화율 덕분에 유지보수 비용 또한 부담이 없었다. 덕분에 포니는 자가용은 물론 택시로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76년 8월에 전국의 영업용 택시는 2만 9,000여대에 달했는데, 이 중 포니가 출시 6개월 만에 2,232대로 10%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또한 이는 포니 첫 해 판매량의 20%에 달하는 대수였다. 아직도 초록색의 포니 택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국내에서 중형택시가 본격적으로 운행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이 시기에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7%에 달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부터 1985년까지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가 20만대에서 100만대까지 치솟았다. 이와 같은 고속 경제성장 덕분에 소비자들은 소형차보다 넓은 차체와 실내, 큰 엔진을 가진 중형차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연스레 택시 중형화 바람이 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확정 소식까지 더해지자 택시 회사와 개인 영업용 운전자 모두 앞다투어 중형 택시를 구입했다.
중형 택시 시대에 들어 현대자동차는 스텔라를 앞세워 택시 시장을 점유해나갔다. 그러나 이는 각종 품질문제에 시달린 탓에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포드와의 계약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계약이 만료되기 전 스텔라를 서둘러 출시했고, 각종 결함에 노출된 것이다. 이에 현대자동차는 약 1만 5,000대에 달하는 스텔라를 리콜하기도 했다. 현대자동차는 1985년에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한 스텔라 CXL을 출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스텔라는 1990년에 중형 택시시장 점유율이 85%에 달할 정도로 판매량이 높았다. 자가용 스텔라의 경우 1992년에 단종되었으나, 택시용은 1997년 2월에서야 생산을 종료하며, 13년 7개월이라는 긴 수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1990년대에는 재계 라이벌이던 대우자동차가 고급화를 꾀하며 현대자동차 중심의 택시 시장에 조금씩 균열을 냈다. 1990년대 초, 대우자동차의 로얄 듀크는 중형 택시 시장 점유율 9.4%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를 대체한 로얄 프린스는 주목할 만한 판매고를 보이기 시작했다. 로얄 프린스는 직렬 4기통 2.0리터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를 장착했으며, 후륜 구동 방식을 사용했다. 로얄프린스는 스텔라의 아성을 위협하지는 못했지만, 기아의 콩코드 및 캐피탈 택시와는 호각지세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택시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어떤 것일까? 국내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 제3조에 따르면 택시는 전장과 전폭, 배기량에 따라 경형과 소형, 중형, 대형, 모범, 고급의 6가지로 분류된다. 이 중 경형과 소형, 중형의 전장과 전폭, 배기량은 일반적인 자가용을 나누는 기준과 동일하다.
대형 택시는 승차정원이 6인승 이상 10인승 이하, 배기량은 2,000cc이상, 또는 배기량 2,000cc이상에 승차정원이 13명 이하인 승합자동차를 가리킨다. 다음으로 모범형은 배기량 1,900cc이상의 승용자동차를 가리킨다. 배기량만으로는 쏘나타와 K5 등의 자동차도 모범 택시가 될 수 있는 셈이다. 또한 모범택시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기종과 고급형으로 나뉜다. 과거 고급형 모범택시의 기준은 배기량이 3,000cc를 넘어야 했으나, 2015년에 2,800cc로 하향 조정되었다.
처음부터 모든 택시들이 LPG를 연료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LPG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1년부터 시작된 국제 유가 상승이 원인이었다. 당시 국내 유가도 상승률이 21%에 달했다. 이에 택시 기사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등장한 대안이 바로 LPG였다. 여기서 ‘암암리’라 불렸던 까닭은, 당시 상공부에서는 에너지 공급 조절을 이유로 택시의 LPG 개조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료비가 곧 소득과 직결되는 운송업계로서는 이만한 유혹도 없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LPG로 개조하는 택시의 수는 갈수록 증가했다. 1974년 11월 30일자 신문에 따르면, 약 1만 2,000대의 서울 택시 중 LPG 사용을 허가 받은 차량은 불과 533대이며, 약 8,000여대가 불법으로 LPG를 사용해왔다고 한다.
택시업계의 지속적이며 강력한 요구에 따라 정부도 차츰 LPG 택시의 문턱을 낮춰갔다. 정부가 1977년부터 점점 LPG택시의 변경을 허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첫 단계는 서울시의 택시들이었다. 그 이전에 정부는 LPG 택시를 1,800대로 제한했지만, 4.5배에 달하는 8,000대로 확대했다. 또한, 신규 차량 등록 시에도 LPG 사용을 허가하며, LPG 택시의 수를 늘려갔다.
현재 택시로 사용되는 차종들의 종류는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수입차가 택시로 사용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수입차로 택시 영업을 한다는 것은 유류비와 유지비의 부담으로 인해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고급화 전략이 택시 업계에서도 통하기 시작했다. 특히 카카오 택시는 메르세데스 벤츠 E클래스와 BMW 5시리즈로 운영하는 ‘카카오블랙’서비스를 개시했다. 이 차종들은 루프의 택시등을 없애고, 영업용 차량의 상징인 노란색 번호판만 부착해 고급스러움을 추구했다.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온 환경규제는 친환경 차량의 도입도 불러왔다. 국토교통부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프리우스와 전기차인 SM3 Z.E 또는 아이오닉 일렉트릭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이 기종들 역시 별도의 택시 라인업이 마련된 차량은 아니다. 이 중 아이오닉 일렉트릭은 전장이 4,470mm인 까닭에 소형택시로 분류되어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2017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