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겹거나 지겹거나, 국내 사골 자동차

일반적으로 자동차 제조사들은 각 기종마다, 5~7년을 주기로 풀체인지를 단행한다. 만약 이러한 기간이 지났음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면, 라이벌 기종에 비해 뒤떨어진 상품성과 식상해진 디자인 때문에 소비자들이 외면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일부 제조사의 자동차들은 9~10년째 큰 변화 없이 디자인과 성능을 고수해오고 있다. 이들은 왜 변화하지 않는 것일까? 이번 콘텐츠에서는 국내 자동차 중 장수(長壽)’ 기종이라 불릴만한 자동차들에 대해 알아본다.

포터2와 그랜드 스타렉스, 나이를 합치면 무려 23살?

현대자동차의 승용 라인업은 대부분 일정한 주기에 따라 외관이든 전체적인 설계든 거르지 않고 변화를 단행한다. 그러나 상용차는 그러한 변화에 있어 다소 인색하다. 버스인 카운티와 에어로타운과 같은 상용차가 대표적인 예다.

승용과 상용으로 나뉘는 그랜드 스타렉스 역시 현대자동차의 대표적인 장수 기종이다. 지난 2007 5, 기존 스타렉스의 자리를 대체해 출시된 그랜드 스타렉스는 2017년으로 출시 10년을 맞이했다. 그랜드 스타렉스의 경우에는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러한 성과의 기반이기도 하다. 그랜드 스타렉스 판매량의 대부분은 화물용 밴이며, 매달 평균 4,000대 이상 판매되고 있다. 현대자동차로서는 굳이 리스크가 큰 변화를 감행해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러한 까닭에 그랜드 스타렉스는 변화에 소극적이었고, 출시 9년 만인 지난 2016 8월에서야 페이스리프트를 단행했다. 라디에이터 그릴과 안개등, 인테리어 디자인의 변경 등이 이루어졌지만, 그보다 가장 큰 변화는 유로6에 대응해 요소수를 이용한 선택환원촉매(SCR) 장치를 장착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포터2 역시 장수 중인 현대자동차의 상용 라인업 중 하나다. 포터2의 출시일이 2004 1월인 것을 감안하면, 올해로 열세살인 셈이다. 그동안 포터의 디자인 중 눈에 띄게 변화한 부분은 프론트 범퍼와 안개등이 전부였다. 포터2가 크게 변화하지 않은 이유도 스타렉스와 비슷하다. 별도 광고나 판촉활동 없이도 매달 1만대 가까이 판매되는 스테디셀러 기종이며 경쟁 기종 대비 압도적인 판매량을 보이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봉고3조차도 포터 판매량의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포터2의 주요 소비층은 농촌과 어촌, 건설업, 소상공인 등으로 유행에 민감한 소비자들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터2 역시 그랜드 스타렉스처럼 디자인과 성능에 변화를 줄 필요가 없는 셈이다. 실제로 스웨덴의 대형 상용차 브랜드인 스카니아의 트랙터는 21년 만에 풀체인지를 단행하기도 했을 정도로, 상용차들은 승용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풀체인지 주기가 긴 편이다.

이유 있는 사골 모하비, 과연 변할까?

기아자동차의 라인업에도 사골(통상적인 풀체인지 시기가 지났음에도 변화하지 않는 장수 차종을 일컫는 은어)’에 가까운 자동차가 있다. 지난 2008 1월 국내에 첫 선을 보인 모하비가 그 주인공이다. 모하비는 출시 당시 현대자동차의 베라크루즈가 유일한 경쟁자였다. 지난 2015 10월에 베라크루즈가 단종되며 맥스크루즈가 또다른 대항마로 떠올랐지만, 해당 체급의 SUV 소비자들은 바디 온 프레임 방식의 모하비를 선호했다. 맥스크루즈의 디젤 엔진은 직렬 4기통 2.2리터(2,199cc)방식이 전부였으며, 전장과 전폭, 전고, 휠베이스 모두 모하비가 크고 길었다. 또한, 모하비의 프레임바디는 험로 주파력이 뛰어난 SUV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실제로 모하비는 맥스크루즈 출시 이후에도 대형 SUV 판매량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모하비의 풀체인지 시기는 점차 늦춰졌으며, 현재는 출시 10년차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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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비는 지난 2016년 1월에 페이스리프트를 거쳤다. 당분간은 풀체인지될 가능성이 낮다

그러나 지난 5월에 부활한 쌍용자동차의 G4 렉스턴이 모하비 판매량을 넘어서며, 대형 SUV시장의 변화 예고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아자동차가 기존 모하비의 설계와 디자인을 그대로 이어나갈지, 2016년 북미국제오토쇼에서 공개해 호평을 얻은 SUV 콘셉트카인 텔루라이드를 현실화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텔루라이드는 2016년 말, 미국산업디자인협회가 주관하는 굿디자인어워즈를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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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텔루라이드 콘셉트
외관 변화만으로는 경쟁력이 부족했던 쉐보레 크루즈

2017 1월에 쉐보레는 신형 크루즈를 공개했다. 현대자동차의 아반떼 AD가 연일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는 가운데, 견고한 섀시 강성과 터보차저를 기반으로 우수한 동력성능을 구현한 신형 크루즈는 자동차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신형 크루즈가 출시되기까지 기존 크루즈에게는 사골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쉐보레는 퍼펙트 크루즈와 어메이징 뉴 2015 크루즈 등, 외관에 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하며, ‘사골이라는 비판에 맞섰다. 또한 국내 시장 상황에 맞게 엔진 라인업을 재정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애초에 1.6리터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과 2.0리터 디젤 터보 엔진으로 시작했지만, 국내 시장에 맞게 1.4리터 가솔린 터보와 1.8리터 자연흡기 가솔린, 1.6리터 디젤 터보 엔진을 적용했다. 눈에 띄는 수치는 아니었지만 지속적으로 동력 성능도 개선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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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출시된 라세티 프리미어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루즈의 판매량은 항상 경쟁 기종을 넘어서지 못했다. 크루즈의 전신은 2008 11월에 출시한 라세티 프리미어였다. 이를 포함하면 크루즈의 역사는 햇수로는 10, 실제로는 8년 반에 달한다. 여기에 경쟁 기종인 현대자동차의 아반떼가 끊임없는 변화를 거쳐 동력 성능과 상품성 부문에서 진화하다 보니 자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라세티 프리미어 출시 당시의 경쟁 기종은 2006년에 출시된 아반떼 HD였다. 그러나 라세티 프리미어가 공개된 지 19개월 만인 2010 8월에 아반떼 MD가 등장했고, 2015 9월에는 아반떼 AD가 등장했다. , 크루즈가 페이스 리프트만 할 때, 아반떼는 3번의 풀체인지를 거친 셈이다. 게다가 2016 1월 북미 국제오토쇼에서 공개한 신형 크루즈는 2017 1월이 되어서야 국내에 수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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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출시된 어메이징 뉴 크루즈
체어맨 H, 박수 칠 때 떠나지 못한 자

1990년대 중반 쌍용자동차의 승용 라인업은 온통 SUV뿐이었다. 이에 쌍용자동차는 라인업에 세단 장르를 추가하기로 계획했고,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메르세데스 벤츠와 협업했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이에 응해 E클래스(코드네임 W124)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의 공급을 결정했고, 이를 바탕으로 1997 10월에 탄생한 것이 바로 쌍용자동차의 기함인 체어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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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124 E클래스의 모습

체어맨은 출시 첫날 1,134대가 계약되며, 순식간에 국내 대형세단의 강자가 되었다. 특히 메르세데스 벤츠에게 물려받은 섀시와 엔진, 변속기, 충돌안전성은 국내 소비자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간 체어맨은 1999년 현대자동차 에쿠스의 출시, 1998~2000년 대우자동차와의 합병 및 분리, 2003 3월 기아자동차 오피러스의 출시, 수입차의 대형차 시장 잠식으로 인해 성공가도에 잠시 제동에 걸리는 듯했다. 그러나 2003 9월에 뉴 체어맨을 선보였고, 대형차 시장 점유율 38%를 달성하며 1위에 재진입 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대형차 시장 1위라는 성적은 2004년 중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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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어맨H의 마지막을 장식한 뉴 클래식

그러나 2004년 중순을 기점으로 체어맨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로디우스와 카이런, 액티언이 연달아 실패해 2002~2003년까지 4~6천억 원에 달하던 당기순이익은 2004년에 114억 원으로 급락했으며, 2005년에는 1033억 원의 적자를 내기도 했다. 이에 더해 2004 8월에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상하이 자동차는 회계조작과 기술 유출이라는 상처만 남긴 채 지분의 대부분을 매각해버렸다.
 
1997년에 머물러있던 기술력의 한계도 체어맨의 실패 원인으로 꼽힌다. 에쿠스와 오피러스는 페이스리프트와 풀체인지 시기마다 향상된 동력성능과 신기술을 선보였지만, 자본이 부족했던 체어맨은 연구개발에 투자하지 못했다. 실제로 2014년식 뉴 체어맨H의 플랫폼과 엔진의 출력, 변속기는 1997년식 체어맨의 것과 동일하다. 2008년 쌍용자동차는 뒤늦게 메르세데스 벤츠의 V8 5.0리터 엔진과 7단 변속기를 체어맨 W라는 새로운 플래그십에 도입했으나, 이미 쌍용자동차와 체어맨의 위상은 떨어진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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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벤츠에서 가져온 V8 5.0리터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

하지만 쌍용자동차의 입장에서는 그나마도 몇 안 되는 차종을 단종시킬 수는 없었다. 특히 마진율이 높은 데다가, 과거 대형차 점유율 1위를 수 차례 기록한 체어맨이라는 가치는 더욱 소중했다. 이러한 이유로 쌍용자동차는 초기형 체어맨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인 체어맨 H를 출시 18년 만인 2015년에 단종시켰으며, 체어맨 W9년째 이어오고 있다.

성공하는 이들에게는 그 다음을 생각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이들은 현재 순항하고 있더라도, 오히려 지금이 위기라는 의식 속에 변화할 준비를 멈추지 않고 4~5년 후를 내다본다. 물론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그러한 시야를 갖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냉정하다. 운 좋게 사골전략으로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연이거나, 더 거대한 불행이 유예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자동차 산업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