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규제에 대처하기 위한 배기량 다운사이징의 여파로, 대배기량 엔진들은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대배기량의 V8 엔진 역시 고성능과 배기량 대비 효율 모두를 만족시키며 생명력을 연장해가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V8 형식의 엔진은 회전 질감과 폭발 특성 및 특유의 배기음으로 인해 자동차 마니아들의 정서를 자극한다. V8 엔진의 이러한 특성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크랭크샤프트의 설계와 작동 방식의 영향이 크다.
대배기량 엔진의 소형화,
V 엔진
일정한 뱅크각을 사이에 두고 실린더들이 마주보는 V형 엔진은 19세기 말, 카를 벤츠와 빌헬름 마이바흐가 선박용으로 선보인 적이 있다. V형 엔진의 장점은 대배기량 엔진의 소형화다. 또한 직렬 엔진에 비해 높이가 낮아지며 무게 중심을 낮출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뱅크각이 클수록 강해진다.
크랭크샤프트와 실린더, 피스톤 등 각 부품의 조합은 직렬 엔진과 대동소이하다. 다만 구조 상 V형 엔진의 크랭크 저널(주축)에는 2개의 커넥팅 로드가 연결된다. 따라서 기본적인 움직임이 다소 복잡해지는 편이나 최근의 자동차에서는 이러한 한계점들은 대부분 극복되어 있는 상태다. 고회전형이거나 강력한 최대 토크를 발휘하는 고성능 엔진의 경우에는 단조 크랭크샤프트를 사용한다. 단조 크랭크샤프트는 고회전시 발생하는 강한 비틀림 등을 견디는 능력이 우수하나 무게가 무겁다. 상대적으로 3.0리터급 엔진 중에서도 고성능형보다 일상 주행형에 가까운 V형 엔진에는 주조 제품의 크랭크샤프트가 적용된다. 곧 자동차의 엔진 성능 향상은 이 크랭크샤프트의 강성 강화와 경량화를 위한 소재공학 연구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V8 엔진의 두 유파,
플랫 플레인 vs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
진동의 최소화와 사운드의 최적화라는 과제는 엔진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엔진이 생산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과제이다. 냉정히 봤을 때 두 가지 요소 모두 열효율의 최적화라는 방향에서는 극복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자동차를 동물 등에 비유하며, 생명체로서의 감각도 부여했다.
이러한 진동과 사운드는 전체 배기량과 실린더 당 배기량 흡∙배기 레이아웃 및 터보차저, 스파크플러그의 특성 등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 중 피스톤의 왕복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바꿔주는 크랭크샤프트의 영향이 지대하다. 특히 배기량 자체가 크고 크랭크 저널이 4개인 V8 엔진의 경우 크랭크샤프트는 엔진의 성격을 정의하기도 한다. 여기서 크랭크샤프트를 측면에서 봤을 때, 저널들 간의 각도가 180°인 것을 플랫 플레인(flat plane), 각기 다르게 90°로 되어 있는 것을 크로스 플레인이라고 한다. 크로스 플레인은, 측면에서 봤을 때 각 저널의 방향이 십자가 형태인 데서 붙은 이름이다.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는 상대적으로 대형 상용차 엔진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진동이 적은 까닭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의 구조를 생각하면 다소 역설적이다.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는 움직임이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고회전 시 회전 방향으로 많은 모멘트(힘의 작용)가 발생한다. 또한 상하 왕복 운동을 하는 피스톤의 모멘트가 가감을 통해 0이 되기 어려운 까닭에 진동은 점점 커진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크랭크암에는 부채꼴의 카운터웨이트(혹은 밸런스웨이트)라는 추가 적용된다. 즉 이 추의 무게를 활용해, 무게의 불균형과 이로 인한 진동 등을 제어하는 것이다.
플랫플레인 크랭크샤프트는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에 비해, 샤프트를 중심으로 한 힘의 편차가 적다. 따라서 고회전을 구현하기에 유리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카운터웨이트의 활용도를 높인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에 비해 엔진의 진동은 강한 편이다. 그러나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처럼 카운터웨이트가 크지 않은 까닭에 크랭크 케이스의 부피와 무게를 줄일 수 있다. 스포티한 고성능 자동차에서 이는 큰 장점이다.
유럽과 미국의 다른 길,
V8 엔진도 예외 아니다?
자동차 산업의 발전 경향에 있어 달라도 참 많이 다른 미국과 유럽은, V8 엔진과 크랭크샤프트의 적용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최근에는 두 시장에서 자동차 개발의 방향이 두 공통, 보편을 지향하는 경향은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고성능 차량을 바라보는 관점은 불과 21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미국과 유럽이 큰 차이를 보였다.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는 상용차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대배기량 중심의 미국 고성능차에도 적용되었다. 특히 닷지의 고성능 차종들인 헬캣 시리즈나 양산형의 포드 머스탱 5.0리터(5,035cc) V8 GT 등의 차종은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를 사용한다. 회전에는 적합하지 않은 크랭크샤프트인 까닭에, V8임에도 최고 출력 발휘 엔진회전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예컨대. 6.2리터(6,166cc) 슈퍼차저 헤미 엔진을 장착한 닷지 챌린저 SRT 헬캣의 경우 717hp의 최고 출력 발휘 시점이 6,000rpm 수준이다. 자연흡기 엔진인 머스탱 GT의 경우 이보다는 약간 높은 7,000rpm에서 446hp의 최고 출력을 발휘한다. 마니아들 중에는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야말로 정통 V8다운 엔진 사운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 유럽의 고성능차들은 안정적인 플랫 플레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현재 고성능차량 중 안정성과 퍼포먼스의 모든 면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는 페라리, 맥라렌의 고성능 엔진들은 대부분 플랫플레인 크랭크샤프트를 적용하고 있다. 고회전에서도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색을 자랑하지만 저음역대에서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구현된다.
플랫플레인 크랭크샤프트 엔진은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 대비 카운터 웨이트의 무게 활용도가 낮은 만큼 역설적으로 진동이 강하다. 물론 마니아들은 이 특유의 고동감과 그르렁거리는 사운드를 선호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배기량이 적어 엔진 무게가 가벼워 자동차의 밸런스가 우수하다는 점도 높이 산다. 배기량 대비 출력도 우수하다. 역시 플랫플레인 엔진인 F154 3,855cc 트윈터보 엔진을 장착한 페라리의 포르토피노는 600hp(7,500rpm)을 발휘한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먼저 미국 시장에서도 고회전형을 지향하는 차종에는 플랫플레인 크랭크샤프트를 적용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머스탱 쉘비 GT 시리즈들이다. GT350의 5.2리터(5,163cc) 자연흡기 엔진은 526hp의 최고 출력을 발휘하며 엔진 회전수는 7,500rpm에 이른다. 특이하게 자연흡기 엔진이면서 압축비가 1:12로 최대 토크도 59.2kg∙m(4,750rpm)에 달한다. 6단 수동변속기가 적용되어 있는데, 고성능차의 변속 타이밍에 익숙지 않은 운전자들은 엔진에 상당한 무리를 줄 수 있는 파워트레인이다.
그런가 하면 메르세데스 AMG는 대배기량 자연흡기 엔진인 M156 6.2리터(6,208cc) 엔진부터 최근 AMG GT 등에 정용되는 4.0리터 바이터보 엔진 등에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를 채택했다. 메르세데스 AMG의 크로스플레인 크랭크샤프트 엔진들은 미국 제조사의 경우와 달리 최고 출력 발휘 회전수가 높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회전 영역에서도 낮고 우렁찬 배기음은 엔진의 형식을 넘어선 명품 사운드를 자랑한다.